ADVERTISEMENT

이창동 '버닝' 떠오른다…베니스 사로잡은 日거장의 시골 젠트리피케이션 경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3월 27일 개봉)는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일본 산골마을에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글램핑장을 개발하려고 하면서 싱글파더 타쿠미와 딸 하나가 소동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그렸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3월 27일 개봉)는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일본 산골마을에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글램핑장을 개발하려고 하면서 싱글파더 타쿠미와 딸 하나가 소동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그렸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우거진 숲에서 장작을 얻고, 깨끗한 개울물을 마시며 살아간다. 이런 천혜의 자연을 간직한 일본 산골마을에 글램핑 야영장 건설이 계획된다.

29일 개봉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日거장 하마구치 류스케 생태 영화 #지난해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 #하마구치 “도시 논리가 산골 개인에 영향"

도시에서 찾아온 기획사 주최 설명회는 오염을 우려한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히고, 건설사 직원들은 마을 사정을 꿰뚫고 있는 토박이 타쿠미(오미카 히토시)를 회유하려 한다. 그러나 타쿠미의 딸 하나(니시카와 료)가 갑자기 사라지고 예기치 못한 사건까지 벌어진다. 유일한 단서는 타쿠미의 이런 경고다.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져.”
마을에 닥친 비극의 진짜 범인은 누구일까.
지난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수수께끼 같은 결말로 주목받은 일본의 젊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45) 감독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개봉(3월 27일) 첫 주말 독립‧예술영화 흥행 1위(31일까지 누적관객 1만9308명)에 올랐다.

日 젊은 거장의 '농촌 젠트리피케이션' 경고

2021년 한 해에 영화 ‘우연과 상상’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드라이브 마이 카’로 칸 국제영화제 각본상, 이듬해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을 잇따라 차지한 하마구치 감독의 작품 세계가 넓어졌다는 평가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베니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까지 석권하며, 일본 영화계 전설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를 잇는 4대 영화제 그랜드슬램 수상 기록을 세웠다.
영화는 ‘시골 젠트리피케이션’(미국 매체 ‘버라이어티’), ‘친환경 드라마’(‘콜라이더’)로 수식된다. 개인의 내밀한 일상을 응시해 삶의 진실을 발견해온 관조적 연출이 전작의 주된 배경이었던 도시에서 침엽수가 우거진 깊은 설산(雪山)으로 무대를 옮겼다. 초기작 ‘해피아워’(2015)가 318분에 달할 만큼 트레이드마크인 긴 러닝타임, 홍상수‧에릭 로메르 감독에 비견됐던 풍성한 대사를 106분 안에 확 줄이고, 과묵해졌다. 도드라지는 건 자연의 떨림과 움직임을 선율에 담은 음악과 사운드다.

콘서트용 영상 의뢰했더니, 베니스 심사위원대상

지난해 9월 9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제80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연 배우 오미카 히토시(왼쪽)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은사자상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활짝 웃고 있다. 로이터=연합

지난해 9월 9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제80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연 배우 오미카 히토시(왼쪽)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은사자상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활짝 웃고 있다. 로이터=연합

3년 전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함께한 이시바시 에이코 음악감독이 자신의 라이브 콘서트용 영상을 하마구치 감독에게 의뢰한 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출발점이 됐다. 뮤직비디오 연출 경험이 없는 하마구치 감독은 이시바시 음악감독이 음악 작업을 해온 나가노현 주변 시골의 자연과 현지 주민들을 취재하던 중 영화 속 글램핑장 설명회와 비슷한 상황을 목격했단다.
이를 토대로 콘서트를 위한 무성 영상(‘Gift’)과 별도의 장편 극영화까지, 두 개의 버전을 완성해냈다. 주연은 전작처럼 연기가 처음인 비전문 배우가 맡았다. ‘우연과 상상’ 스태프이자 이번 영화 준비 과정을 함께한 오미카 히토시의 “살쾡이 같은 얼굴과 느낌이 좋아서” 배역을 제안했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3월 27일 개봉)는 일본 차세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으로,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이로써, 하마구치 감독은 칸영화제(드라이브 마이 카), 베를린영화제(우연과 상상)까지 세계 3대 영화제를 모두 석권하는 영예를 안았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3월 27일 개봉)는 일본 차세대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신작으로, 지난해 베니스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이로써, 하마구치 감독은 칸영화제(드라이브 마이 카), 베를린영화제(우연과 상상)까지 세계 3대 영화제를 모두 석권하는 영예를 안았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지난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로 부산 국제영화제를 찾은 하마구치 감독은 “장기적인 결과를 생각하지 않는 일들이 최근 10년 동안 일본에서 많이 벌어졌다”면서 “장기적으로 어떤 일을 초래할지 예상하지 않고 단기적 이익을 좇는 전형적인 패턴이 문제”라고 밝혔다.
앞서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선 “인간이 자연에 들어갈 때마다 자연을 파괴하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조율해 갈 지에 대한 대화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관점을 절제한 대사에 담았다.
가령 타쿠미가 “글램핑장 예정지가 사슴이 다니는 길”이라고 알려주는 대목이다. “사슴들은 어디로 갈까?” 그가 묻자, 도시에서 온 기획사 직원들은 “어디론가 딴 데로 가겠죠”라고 무관심하게 답한다. 영화 초반부터 들려오는 사슴 사냥꾼의 총성도 불안감을 조성한다.

하마구치 "글램핑, 도시인의 자연 취사선택"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3월 27일 개봉)의 사슴이 노니는 아름다운 숲속 자연은 사슴 사냥꾼의 총소리, 글램핑 야영장 개발붐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3월 27일 개봉)의 사슴이 노니는 아름다운 숲속 자연은 사슴 사냥꾼의 총소리, 글램핑 야영장 개발붐으로 인해 흔들리기 시작한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인간 관계, 마음의 여정을 마치 '그래비티'처럼 체험하게 해주는”(봉준호 감독) 하마구치 영화의 특성은 글램핑장 설명회 장면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건설사 측과의 적막한 긴장감, 주민들의 긴 발언, 헛웃음을 짓게 만드는 부조리한 상황 등을 편집된 화면이 아니라 관객이 실제 설명회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으로 살려냈다.
“상류에서 한 일은 반드시 하류에 영향을 준다. 눈앞의 돈벌이에 급급해 더러운 물을 전부 하류에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나이 지긋한 주민의 충고는 영화를 보는 모두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하마구치 감독은 영국 매체 ‘어나더 매거진’ 인터뷰에서 “글램핑은 도시인들이 자연을 편리하게 취사선택하는 방식을 보여준다”면서 “도시에 산다는 건 쓰레기를 밖에 버리고 주변으로 밀어내는 것”이라 꼬집기도 했다.

"악은 어디에든 존재? 자연에 선악은 없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3월 27일 개봉)에서 글램핑장 건설사의 홍보업무를 대행해 시골현장을 찾은 연예기획사 직원들은 숲에 살던 사슴의 운명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무해해 보이는 개개인이 모여 자연의 균형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3월 27일 개봉)에서 글램핑장 건설사의 홍보업무를 대행해 시골현장을 찾은 연예기획사 직원들은 숲에 살던 사슴의 운명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무해해 보이는 개개인이 모여 자연의 균형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그는 이시바시 에이코가 보내온 음악에 맞춰, 자연의 움직임과 떨림을 영상으로 새겨냈다. 영화 속엔 평화로운 숲 장면에서 음악이 거칠게 끊기는 장면도 많다. 이대로 가다간 언젠가 자연이 가혹한 최후를 맞을 수 있다는 경고로 읽힌다.
“새끼를 보호하거나 다칠 때를 제외하고는 결코 공격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붙는 야생 사슴의 습성은 극중 인간에게도 영향을 준다. 자본의 논리가 보이지 않는 손처럼 개인의 운명을 말살할 수 있다는 주제의식은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이 연상된다”(미국 매체 '인디와이어')는 평가를 받는다.
자본은 웃는 얼굴로 다가오고, 삶을 침해 당한 자들의 반격은 절박하다.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사회에서 악이란 과연 무엇일까.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갖고 따질 수 있을까. 제목의 의도다.
하마구치 감독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을 보면 관객들이 영화에서 자신만의 답을 찾게 될 거라 생각한다”면서 “자연에는 선과 악, 정의란 게 없다. 악은 어디에든 존재한다는 통념에 카운터 펀치를 날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3월 27일 개봉)에서 개울물을 길어다 밥을 해먹는 산골 마을 주민들은 글램핑장이 들어오면 제안된 부지의 정화조가 식수를 오염시킬 거라고 걱정한다. 건설사가 파견한 직원들은 "오염수라 해봤자 도시보다 훨씬 깨끗하다"고 무신경하게 반응한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3월 27일 개봉)에서 개울물을 길어다 밥을 해먹는 산골 마을 주민들은 글램핑장이 들어오면 제안된 부지의 정화조가 식수를 오염시킬 거라고 걱정한다. 건설사가 파견한 직원들은 "오염수라 해봤자 도시보다 훨씬 깨끗하다"고 무신경하게 반응한다. 사진 그린나래미디어, 레드아이스엔터테인먼트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