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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막장극 빼닮은 입센 말년극 ‘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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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연극 ‘욘’을 연출하는 고선웅 예술감독(왼쪽)과 드라마트루기 김미혜 교수.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연극 ‘욘’을 연출하는 고선웅 예술감독(왼쪽)과 드라마트루기 김미혜 교수.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현대극의 아버지’ 헨리크 입센(1828~1906)이 만년의 고독을 토해낸 희곡 『욘 가브리엘 부르크만』(이하 ‘욘’)이 오는 29일부터 다음 달 21일까지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세종M씨어터 무대에 오른다.

‘욘’은 김미혜(76)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명예교수가 노르웨이 원작을 한국어로 번역한 입센 전집(총 23작품, 10권)을 토대로 한 첫 연극이다. 그간 국내에서 입센은 영어·프랑스어 등 외국어 중역본 위주로 소개됐다. 지난해 입센 전집 번역으로 노르웨이 왕실 공로 훈장을 받은 김 교수를, 고선웅(56·서울시극단 예술감독) 연출과 함께 지난 6일 만났다. 김 교수는 이번 연극의 드라마트루기(극작 방향 설계)를 맡았다.

‘욘’은 서울시극단 부임 2년 차인 고 연출이 지난해 연극 ‘겟팅아웃’ ‘카르멘’에 이어 직접 연출한 세 번째 작품이다.  ‘귀토’ ‘회란기’ ‘칼로막베스’ 등 고전을 연극·뮤지컬로 옮겨온 그가 처음 무대에 올리는 입센을 어떻게 해석할지 공연 팬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원작 희곡 『욘 가브리엘 부르크만』에 영감을 얻은 뭉크의 자화상 ‘밤의 방랑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원작 희곡 『욘 가브리엘 부르크만』에 영감을 얻은 뭉크의 자화상 ‘밤의 방랑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고 연출은 ‘눈보라 치는 고독 속에서’란 부제를 달았다. 고립이 만연한 우리 사회에 대한 은유일까. 고 연출은 “‘욘’을 단숨에 읽고 감동이 몰려와 울었다. 19세기 노르웨이 희곡인데 지금 우리 사회 배경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우리 사는 얘기’”라고 말했다.

“재미란 캐릭터 간 충돌에서 나온다”는 그는 “‘욘’은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와 옛 사랑, 이런 관계가 적나라하고 피부에 와 닿는다”고 했다. 김 교수도 “입센 희곡에 한국식 막장 코드가 진짜 많다”면서 “인간은 왜 사는가 질문하는 실존주의극의 시초”라고 설명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은행가로 성공했던 욘(이남희)은 은행 파산으로 한순간 몰락한다. 젊을 적의 백만장자 꿈을 포기 못한 남편이 수치스러운 아내 귀릴(이주영)은 대학생 아들 엘하르트(이승우)에게 희망을 걸지만, 엘하르트는 연상의 이혼녀와 떠나려 한다.

욘 가족의 집은 귀릴의 쌍둥이 언니 엘라(정아미)의 소유다. 엘라는 젊을 적 욘에게 실연당한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조카 엘하르트에게 집착한다. 콩가루 집안의 20년치 갈등이 어느 겨울 하룻밤 사이에 터져 나온다.

『인형의 집』 『민중의 적』 등에서 입센이 주창해온 개인 해방론은 ‘욘’에서도 읽을 수 있다. 욘의 ‘그림자’로 살아왔음을 깨닫는 쌍둥이 자매를 통해서다.

“엄청난 열정을 토해내던 사람이 한순간에 몰락하는데, 거기서 오는 페이소스가 굉장해요.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이 사실 별 의미 없고 헛되죠. 사이좋게 잘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작품입니다.”(고 연출)

김 교수는 “세기가 바뀌어도 인간에 대한 입센의 질문은 퇴색하지 않는다”며 “입센을 번역하며 우리 사회도 참 안 바뀐다 싶더라”고 말했다. 고 연출은 “19세기 세상에 던진 이야기가 AI(인공지능) 시대에도 통한다”고 말했다.

이번 연극은 ‘절규’로 유명한 노르웨이 화가 에르바르 뭉크를 오마주한 무대를 선보인다. 욘을 자신과 동일시하며 자화상 ‘밤의 방랑자’를 그리는 등 입센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뭉크는 1897년 파리에서 열린 ‘욘’ 공연의 무대 및 포스터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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