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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옳은 개혁도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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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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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정부는 1995년 사법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서울대 법대 교수 출신인 박세일 청와대 정책수석이 주도했다. 세계 최저 수준인 국민 1인당 변호사 수를 획기적으로 늘리고 로스쿨을 도입한다는 소문이 났다. 대법원이 협상을 제안했고, 사법개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법원·검찰·변호사 대표와 청와대 인사들이 참여했다. 개혁의 주체와 대상이 머리를 맡대고 숙의했다. 연간 300명인 변호사 배출 숫자를 96년 500명, 97년 600명 등 단계적으로 늘려 2000년 이후에는 1000~2000명으로 확대하는 데 합의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도 합의는 지켜졌고,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로스쿨이 문을 열었다. 매년 1700여 명의 변호사가 배출되고 있다.

의대 증원 맞지만 2000명은 무리
세종·영조도 경청…현실 반영해
이승만·박정희 통합 토대로 추진
김영삼 사법개혁도 단계적 접근

의대 정원을 확대하겠다는 윤석열 정부 의료개혁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압도적이다. 그러나 의사들은 집단 파업 중이고,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 때 법원행정처에 근무하면서 청와대와 소통했던 원로 법조인의 의견을 들었다. “이렇게 선전포고식으로 밀어붙일 게 아니라 의료계와 충분한 대화를 나눠야 한다. 2035년에 1만 명의 의사가 부족하지만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대통령이 5년간 매년 2000명 증원 카드를 던진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어떤 전문가도 2000명 카드를 제시한 적이 없다. 정부안의 근거가 됐다는 보고서를 제출한 3개 기관의 당사자들은 연간 750명에서 1000명 정도를 늘리면서 연착륙시키자고 한다. 의료개혁이 처음에는 지지율을 확 끌어올렸지만 지금은 총선 감점 요인이 돼버렸다.

의사 정원을 늘리는 의료개혁은 백번·천번 옳은 정책이다. 의사가 환자를 떠나고, 정원을 줄이자는 건 상식이하다. 그러나 개혁은 나의 방향이 옳다고 해서 반드시 성공하지는 않는다. 더구나 한국의 의사집단은 전투력이 강하지 않은가.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의약분업 과정에서 의대 정원을 351명 줄였고, 2020년 문재인 정부 때는 의사국가고시를 거부하면서 400명 증원 카드를 무산시켰다. 법률가들이 포진한 윤 정부는 “법대로 하자”고 나온다. 그러나 미국의 법 사상가 홈스 전 연방 대법관은 “법의 생명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라고 했다. 세심한 소통과 공감의 과정이 필요했다. 윤 정부는 경직됐고, 서둘렀다.

조선의 성공한 전제군주들도 이렇게 거칠지는 않았다. 1428년 세제개혁에 착수한 세종은 전답 1결당 10말을 정액 징수하는 균등부과 제도를 만들었다. 그러나 바로 시행하지 않았다. 백성 17만 명의 의견을 물었다. 땅이 기름지고 소출이 많은 경상·전라도 농민은 압도적으로 찬성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반대가 더 많았다. 세종은 시행을 유보했다. 격렬한 찬반 토론과 시범 실시를 거쳐 전면 실시된 것은 성종 때인 1489년이었다. 개혁 착수 61년 만이었다.

17세기에 소빙하기가 전 세계를 강타해 유럽에서는 대역병과 마녀사냥이 극성을 부렸다. 중국 대기근은 농민 반란을 촉발해 명청 교체가 이뤄졌다. 조선에서는 경신(庚辛)대기근이 닥쳐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고 시체가 거리를 메웠다. 민생이 초토화된 뒤 등장한 군주가 영조다. 천한 무수리의 몸에서 태어나 사가(私家)에서 청년기를 보낸 영조는 서민의 참상을 알았다. 죽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젖먹이에게 물리는 황구첨정(黃口簽丁)에 시달리던 백성을 위해 군역을 절반으로 줄여 주는 균역법을 시행했다. 창경궁 홍화문에서 백성들의 애소(哀訴)를 들었기에 가능했다. 현실에 바탕을 둔 세제 개혁으로 조선은 임란(壬亂), 호란(胡亂)과 대기근의 후유증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도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과감하게 농림부 장관으로 발탁하고, 대지주인 한민당 지도자 김성수의 자기희생적 협조를 얻었기에 성공했다. 내부 통합에서 출발해 전 국민을 지주로 만든 농지개혁은 대한민국 최초의 경제민주화 조치였다. 한국전쟁 때 적화되지 않고 훗날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훗날 비판자가 되는 장준하가 발행한 『사상계』 지식인 그룹의 경제개혁 제안에 주목했다. 계획경제, 공업 중심의 불균형 성장론, 기간산업 집중 육성, 미국 이외 국가로의 원조 다각화, 저축 강행과 소비절약, 수출 확대는 군정의 정책에 모두 반영됐다. 사상계는 교착된 한·일 문제 해결을 촉구하며 새 정부가 직면할 현실을 측면에서 도와줬다. 함석헌은 5·16을 “신속히 이뤄져야 할 복부 수술”이라고 했다(『만주 모던』 한석정).

윤 대통령이 달라져야 한다. 국민의힘 수도권 후보들의 제안대로 의대 정원까지 테이블에 올려놓고 협의해야 한다. 총선이 끝나면 결과와 무관하게 예스맨들을 모두 내보내고 “노”라고 직언할 수 있는 인물로 새 진용을 짜야 한다. 아무리 미워도 야당과 대화하고 통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 그래야 남은 임기 3년 동안 옳으면서도 성공한 개혁을 이뤄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