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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 눈에 밟혀…" 사직서 내고도 가운 입은 교수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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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3호 08면

의대 증원 갈등

29일 오후 부산대학교병원 교수들이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등 정부의 의대 증원 주장 근거를 반박하고 의료 현장의 문제점을 담은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스1]

29일 오후 부산대학교병원 교수들이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등 정부의 의대 증원 주장 근거를 반박하고 의료 현장의 문제점을 담은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뉴스1]

“사직서를 냈지만 병원을 어떻게 나가겠어요. 지금 교수들이 병원을 떠날 수 있는 상황은 죽어서 나가거나 병원이 망해서 나가는 것, 둘 중 하나밖에 없어요.”

지방 국립대병원 혈액종양내과 A교수는 2주째 낫지 않는 감기 탓에 잔뜩 잠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병원을 떠난 지 6주째. 의대 교수들도 지난 25일부터 집단 사직서 제출에 나섰지만 대부분의 교수들은 A교수처럼 사직서를 제출한 뒤에도 여전히 의료 현장을 지키며 전공의들의 몫까지 떠맡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사직서는 ‘사태를 빨리 해결해 달라’는 의도로 낸 것일 뿐 어떻게 환자를 두고 떠나겠느냐”고 입을 모은다. 다만 장기화되는 격무로 쌓여가는 피로와 평소라면 치료가 가능했을 환자를 살리지 못하는 좌절감에 “이대로 더는 버티기 어렵다”며 고충을 토로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특히 중증·응급 환자를 보는 대형병원 필수과 교수들은 살인적 업무 강도를 호소하고 있다. 경증·비응급 환자 진료는 최대한 1·2차 병원으로 분산하더라도 생명과 직결된 고난도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까지 외면하긴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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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일에 한 번꼴로 당직을 서면서 입원 환자도 사태 이전과 비슷하게 보고 있다는 A교수는 “솔직히 병원에서 사직서를 받아주면 감사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적·신체적으로 힘든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어린 백혈병 환자 보호자가 내가 떠날까 걱정됐는지 나를 ‘친절 직원’으로 추천하는 글을 올렸더라”며 “이런 환자들이 눈에 밟혀 이분들까지는 살리고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다”고 전했다.

수도권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B교수도 “젊은 암환자가 복도에서 나를 붙잡고 ‘교수님, 안 나가실 거죠’라고 묻는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며 “중증·응급 환자는 이전과 다름없이 발생하는데 응급실만큼은 끝까지 열어둬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어떻게든 환자들을 살리려 노력하고 있지만 평소 4~6명이 지키던 응급실을 1~2명이 지키면서 정말 억지로 버티고 있다”며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차원이 아니라 정말 힘들어 그만두겠다는 동료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고 우려했다.

병원에 남은 교수들의 힘이 소진될수록 의료사고 등 환자 피해가 커질 것이란 불안감도 크다. A교수는 “예전엔 한 환자를 두고 우리 과 전공의·전임의부터 진단검사과·병리과 등이 한 팀으로 뭉쳐 치료법을 의논했다면 지금은 나 혼자 모든 판단을 내려야 한다”며 “내가 뭔가 하나 까딱 놓쳐서 환자가 잘못될까 너무 겁이 난다”고 토로했다.

서울 상급종합병원 혈액종양내과 C교수도 “전공의들이 있던 때도 당직 다음날 바로 근무하면 사고 위험이 있다고들 했는데 지금은 그들이 하던 일을 더 나이 든 사람들이 더 강도 높게 하고 있는 실정”이라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의료사고는 언젠가 날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안 나고 있는 게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급성 백혈병 환자는 전국에서 2~3명꼴로 매일 생긴다. 다른 암 발생은 더 흔한 점을 생각하면 이들에 대한 치료가 상당 부분 막혀 있는 현 상황은 이미 파국을 맞은 거나 다름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누구보다 빠른 사태 해결을 바라는 이들은 ‘2000명’ 증원을 두고 대치하는 정부와 전공의들 모두에 아쉬움을 표했다. A교수는 “나도 증원엔 찬성하지만 2000명은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숫자다. 정부가 먼저 증원 규모를 풀어야 교수들도 전공의 복귀를 설득할 명분이 생긴다”며 “정부 태도가 변한 뒤에도 전공의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는 혼내기도 하고 여론의 따끔한 질타도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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