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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하다, 사실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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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기환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기환 경제부 기자

김기환 경제부 기자

‘사실상’ 수식어가 붙은 해명은 경계심을 갖고 한번 더 본다. 반박할 여지 없이 깔끔한 논리를 갖췄다면 굳이 사실상이란 수식어가 불필요해서다. “A가 문제다”라고 지적했을 때 상식적인 반응은 “A는 문제가 맞다. 잘하겠다”라고 시인하거나 “A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다”라고 반박하는 두 가지다. 그런데 “사실상 A를 B라고 봐야 한다”며 눙치는 식은 본질을 흐린다.

기획재정부가 최근 ‘2023 회계연도 총세입·세출 마감 결과’를 발표하며 낸 해명이 그렇다. 56조4000억원 규모 세수(국세 수입) 부족이야 예고된 사실이라 화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난해 불용액(45조7000억원)이 주목받았다. 2022년 불용액(12조9000억원) 대비 3배 이상 불어나서다. 전체 예산 540조원 중 8.5%에 달한다. 정부가 예산·회계 시스템을 개편한 2007년 이후 사상 최대치다.

‘불용(不用)’은 말 그대로 예산으로 편성했지만 쓰지 못한 것을 말한다. 세금이 적게 걷혀 난리인데, 한 편으로 재정을 남겼다는 얘기다. 불용이 발생하면 다음 해 예산으로 넘기거나, 올해 진행하는 다른 사업에 돌려쓸 수 있다. 역대 최대 규모 불용에 대해 기재부는 “사실상 불용은 11조원 수준”이라고 해명했다. 구체적으로 “세수 감소에 연동해 줄어든 지방교부세·교부금(18조6000억원)과 정부 내부 거래(16조4000억원) 등 결산상 불용을 제외한 ‘사실상’ 불용만 따지면 10조8000억원으로 줄어든다”고 덧붙였다.

결산과 실제를 사실상이란 수식어로 구분한 것도 따져봐야 하지만 문제는 불용이 크게 늘었다는 사실 자체다. 기재부 설명대로 사실상 불용만 따져도 역대 최대 규모다. 세수 펑크가 발생한 2013년(8조1000억원), 2014년(6조7000억원)에도 불용액은 10조원을 밑돌았다. 예산을 짤 때는 재정이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효과까지 고려해 지출 규모를 결정한다. 이쯤 되면 정부가 주어진 예산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해 경기 침체를 부채질했다는 지적이 타당하지 않을까.

최근 1년 새 비슷한 장면이 이어졌다. 근로시간 개편을 추진하다 반발에 부딪혔을 땐 “사실상 주 69시간까지 근로하는 경우는 드물 것(고용노동부)”, 연구개발(R&D) 예산을 4조6000억원 삭감하고선 “R&D 성격이 아닌 일부 예산 항목을 다시 분류해서다. 사실상 줄어든 건 3조4000억원(과학기술정보통신부)”, 고공 행진하는 물가를 우려하면 “OO 물가만 빼면 사실상 선방하고 있다(기재부)”는 식이다. 흔쾌한 시인도, 설득력있는 반박도 아니다.

비겁하다, 사실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