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마르케스 마지막 소설의 두 가지 배신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82호 29면

8월에 만나요

8월에 만나요

8월에 만나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민음사

아나 막달레나 바흐는 50세를 목전에 둔 여인이다. 매년 8월 혼자 여객선을 타고 카리브해의 한 섬을 방문한다. 어머니 무덤에 꽃을 놓고 오기 위해서이다. 호텔에서 그녀는 혼자 온 낯선 남자를 발견하고, 그와 하룻밤을 보낸다. 결혼 생활 27년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이후 그녀는 8월에 섬을 방문할 때마다 새 남자를 찾는다.

2005년 78세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더 이상 소설을 쓸 수 없다고 말했다. 2012년 가족들은 그가 치매를 앓고 있음을 인정했다. 2014년 그가 타계하고 10년이 지난 지금, 『8월에 만나요』가 출간된 것이다.

마르케스의 고국 콜롬비아의 마르케스 도서관에 『8월에 만나요』가 놓여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마르케스의 고국 콜롬비아의 마르케스 도서관에 『8월에 만나요』가 놓여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이 소설의 존재는 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치매가 진행될 때까지 완성 못 한 이 책에 대해 작가는 ‘쓸모없다. 없애라’고 유언했다. 그런데 자식들이 생각을 바꾸었다. 두 아들은 서문에서 ‘일종의 배신행위지만(이 구절은 한글판에 빠져 있다) 독자가 이 책을 좋아한다면 아버지도 우리를 용서하리라 믿는다’고 썼다.

문학사는 배신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베르길리우스는 미완성의 『아이네이스』를 없애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이를 따를 마음이 없었던 아우구스투스 덕분에 이 고전이 남게 됐다. 에밀리 디킨슨은 죽을 때 여동생에게 모든 편지를 없애 달라고 부탁했다. 부탁대로 하던 중, 동생은 언니의 시가 담긴 트렁크를 발견했다. 유언을 확대해석하면 이것도 태울 물건이었겠으나 동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디킨슨의 시 1800편이 소실을 면했다.

그리고 카프카. ‘모든 원고를 불태워 달라’는 유언을 깡그리 무시한 친구 브로트 덕분에 『소송』과 『성』 같은 작품들이 살아남았다. 나보코프 역시 타계 30년 뒤 유언에 반하여 미완성작이 출간되었다. 없애라고는 안 했으나 미완성인 톨킨의 『실마릴리온』이나 르카레의 『실버뷰』는 모두 아들들이 손질해서 출간되었다. 다 좋은 평을 들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카프카의 예는 늘 호출되지만 같은 차원의 예인지는 의문이다. 이는 카프카라는 작가가 무에서 탄생하는 순간에 관한 신화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8월에 만나요』에서 중요한 것은 ‘없애라’는 유언이 출간 전에도 이미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르케스의 원고를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원고가 존재하는 이상 모든 이해 관계자들에게 이 소설의 출간은 참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이다. “어차피 출간될 원고였다”는 자식들의 말은 사실이다. 시점이 문제였을 뿐이다.

주인공 아나 막달레나 바흐와 동명의 실존 인물(음악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내)의 공통점은 20세에 결혼한 것이다. 그리고 후자의 생애대로라면, 아나와 남편의 사별은 1, 2년이 남았을 뿐이다. 매년 새로운 상대를 찾아 떠나는 그녀의 이야기는 마르케스의 현안, 꺼져가는 창조력과 창작자의 자기갱신 가능성에 관한 우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알 수 없다. 이 엄청난 이름의 가능성은 충분히 실현되지 않았다.

독자들은 두 개의 배신 이야기를 함께 접하게 됐다. 하나는 책에 있는 아나의 배신, 또 하나는 책을 둘러싼 두 아들의 배신. 그렇지만 작가나 독자가 피해를 입을 건 별로 없다. 그의 전성기 대표작들과 비교될 수준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건 노년기의 다른 책도 그랬다.

문학사에서 ‘배신당한 유언’이 반복되는 것은 작가들이 원고를 직접 처리 못 하는 태만과 무능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무능에 숨은 지혜가 있을지 모른다. 1852년 정신적으로 지친 고골은 『죽은 혼』 제2권의 원고를 태웠다. 그러나 그는 곧 불장난을 들킨 사람처럼 이 소각이 실수라고 말했고 악마의 농간이었다고 했다. 그는 식음을 전폐하다 9일 뒤 죽었다.

만일 원고 소각을 유언으로 떠넘겼더라면 어땠을까. 뜻대로 됐을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는 좀 더 살지 않았을까.

김영준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