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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비과시적 소비’가 보여주는 것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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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호 28면

야망계급론

야망계급론

야망계급론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지음
유강은 옮김
오월의봄

요즘 한국에서 탕수육을 먹을 때 부먹과 찍먹이 나뉘듯,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는 차를 마실 때 찻잔에 우유를 먼저 부을지 차부터 부을지가 나뉘었다고 한다.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 먹느냐 찍어 먹느냐가 취향의 문제라면, 차와 우유의 순서는 단지 취향이 아니라 계급적 지표의 문제였다. 우유를 나중에 넣는 것은, 뜨거운 차를 부어도 금이 가지 않는 고급 자기의 소유자들에게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찻잔 같은 자기의 품질이 전반적으로 향상된 20세기에도 ‘우유 먼저’는 영국에서 노동계급 등을 풍자하는 표현으로 쓰였다고 한다.

일견 사소한 듯 보이는 소비 행태가 이처럼 계급·계층 등의 소속 집단을 드러내는 현상은 오늘날에도 나타난다. 미국의 도시·지역계획학, 공공정책학 교수인 저자는 과거 유한계급의 과시적 소비와 비교해 새로운 엘리트 문화집단, 이 책의 표현을 빌리면 ‘야망계급’의 비과시적 소비를 주목한다. 중국산 저가 의류 대신 좀 비싸도 ‘미국산’을 사거나, 미국 대도시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농민 직거래 장터를 이용하고, 잡지 ‘뉴요커’를 읽는 것 등이 그 예다.

미국 워싱턴 D.C.의 홀푸드 매장에 지난달 여러 종류의 과일을 비롯해 신선한 농산물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 [EPA=연합뉴스]

미국 워싱턴 D.C.의 홀푸드 매장에 지난달 여러 종류의 과일을 비롯해 신선한 농산물이 진열되어 있는 모습. [EPA=연합뉴스]

이런 비과시적 소비는 이른바 ‘과시적 생산’과 짝을 이룬다. 누가, 어떻게 생산한 것인지 중시하고 그 투명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는 의미에서 ‘과시적’이다. 유기농 먹거리를 내세운 마트 체인 홀푸드, ‘공정무역’을 넘어 농민과 ‘직접무역’을 통해 고품질 원두를 사용하는 스페셜티 커피 기업 인텔리젠시아, 세계 각지에서 산업혁명 이전 방식의 생산자를 찾아 이들이 만든 옷과 신발 등을 내세우는 인더스트리오브올네이션스, 수공예 제품과 장인 제품의 온라인 장터 엣시 등이 저자가 드는 ‘과시적 생산’의 예다. 이런 품목은 일반적인 대량생산 제품보다 한결 비싸도, 수퍼리치의 사치품만큼 비싼 건 아니다. 저자는 ‘야망계급’이 물질적 재화의 소비보다 희귀한 정보를 포함해 문화자본과 가치관 등이 반영된 소비로 지위를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능력주의 엘리트가 쉽게 떠오르는데, 이들보다 지갑이 얇더라도 가능한 소비다.

한데 이와 달리 ‘대단히 비싼 비과시적 소비’도 있다. 대학 등록금과 개인 육아 돌봄 비용을 포함해 교육과 보육, 의료, 개인연금·보험 등의 소득 대비 지출 비중은 사회적·경제적 지위의 대물림과 한결 밀접하게 맞물린다. 모유 수유를 중심으로 이 책 제4장이 다루는 얘기는 이를 좀 더 뚜렷이 보여준다. 유모나 분유를 우선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모유가 좋다는 게 상식 같지만, 경제적 여건과 직업적 환경 등으로 엄두를 내기 힘든 이들이 있다. 그런데도 ‘야망계급’이 모유 수유나 자녀에게 신선한 유기농 채소 먹이기 등을 ‘도덕적 선택’으로 여긴다면, 이는 다른 계층이 겪고 있는 경제적·사회적 불평등을 간과하는 셈이다.

저자는 불평등의 심화를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 중간계급의 소득은 수십 년 간 정체되어 있고, 이들의 주택 가격 역시 2008년 금융 위기로 하락한 이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책 초반부터 저자는 수퍼리치나 유한계급과 달리 문화자본·가치관 등 ‘야망계급’이 지닌 긍정적 측면 때문에 이들이 더 위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야망계급’, 특히 능력주의 엘리트는 유한계급과 달리 한가롭지 않은 이들이기도 하다. 장시간 일하며 여가 역시 생산적 활용에 골몰한다. 책에는 이런 면면과 함께 도시 생활이 비과시적 소비 등에서 유리한 면면에 대해서도 한 장을 할애한다.

팬데믹 이전인 2017년 영문판이 나온 책인데, 읽고 있으면 최근 한국의 유사한 사례나 현상이 여럿 떠오른다. 불평등 문제에 관심 있는 독자, 크고 작은 소비 트렌드에 관심 있는 독자 모두 흥미롭게 읽을 법한 책이다. 비과시적 소비를 일찌감치 주목한 베블런의 『유한계급론』, 부르드외의 ‘구별짓기’ 같은 이 분야의 고전적 이론은 물론 ‘야망계급’과 비교해 이전 시대의 보보스나 파워엘리트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실증적 분석에 토대를 둔 책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매년 실시하는 소비자지출조사의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과시적 소비와 비과시적 소비의 소득 수준에 따른 변화 등을 보여준다. 원제 The Sum of Small Th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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