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에 맞서던 커밍아웃 총리, 펑펑 울며 돌연 사임한 속사정 [후후월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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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후월드]는 세계적 이슈가 되는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을 파헤쳐 보는 중앙일보 국제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라벤더 천장(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깨고 아일랜드 역사상 최초 동성애자 총리(재임 기간 2017~2020, 2022~현재)에 오른 리어 버라드커(45)가 20일(현지시간) 돌연 사임을 발표했다. 그는 2017년 38세 나이로 첫 총리직을 맡아 아일랜드 역사상 최연소 총리이자, 인도계 아버지를 둔 최초의 혼혈 총리라는 기록도 갖고 있다.

리어 버라드커(가운데) 아일랜드 총리가 20일(현지시간)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사임을 발표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리어 버라드커(가운데) 아일랜드 총리가 20일(현지시간)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사임을 발표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버라드커 총리는 이날 갑작스럽게 기자회견을 열고 “통일아일랜드당의 대표직에서 즉시 사임하고, 총리직에서도 물러난다”고 밝혔다. 이어 “리더십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바통을 넘겨줄 때를 알아야 하고, 그렇게 할 용기를 갖는 것”이라면서 “나는 이 일에 최적임자가 아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사임 이유에 대해선 “개인적, 정치적 고려”라고만 밝혔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았다.

개헌 국민투표 실패…“굴욕” 

영국 매체 텔레그래프는 “확실히 그가 사임할 이유는 많다”면서 지난 8일 좌초된 국민투표 결과를 언급했다. 당시 아일랜드 정부는 1937년 정통 가톨릭 교리에 기초해 제정된 현행 헌법에 수록된 가족과 여성에 대한 정의를 현대적으로 바로잡겠다며 국민투표를 추진했으나 ‘상당한 표 차’로 부결됐다. 텔레그래프는 “역대 어떤 정부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가장 굴욕적인 결과였다”고 비난했다.

버라드커 총리는 앞서 사회적 약자의 권리 강화를 위해 여러 차례 개헌 국민투표를 시도해 통과시킨 바 있다. 2018년 국민투표로 낙태를 허용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보건부 장관 시절인 2015년엔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바 있다. 당시 그는 국민투표를 앞두고 라디오 생방송에 출연해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혔고, 동성애에 대한 국민적 반감을 낮췄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번 국민투표는 이민 문제 등으로 국론이 분열되면서 발목이 잡혔다는 게 외신의 분석이다. 최근 아일랜드에 망명 신청이 급증하면서 일부 극우 세력은 이민자를 흉기로 찌르고, 이민자들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폭력 행위를 벌이고 있다. 버라드커 총리는 이 같은 반(反)이민 극우 세력들에 맞서왔다.

하지만 국민 여론은 이미 반 이민 정서로 기울어진 상태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아일랜드에서 현재 가장 큰 지지를 받고 있는 사회주의·민족주의 정당인 신페인의 당 대표인 메리 루 맥도널드 역시 자국 내 반이민 정서를 두고 ‘이민자 혐오보다는 정부에 대한 비판이 생산적’이라는 취지로 말한 뒤 지지율 하락을 겪었다. 반면 반이민을 내세운 무소속 정치인들에 대한 지지는 오르고 있다.

지난해 12월 아일랜드의 한 오래된 호텔을 난민 수용센터로 개조하는 것에 대해, 마을 주민이 항의하는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12월 아일랜드의 한 오래된 호텔을 난민 수용센터로 개조하는 것에 대해, 마을 주민이 항의하는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혼혈·동성애로 극우파의 지속적 공격

버라드커 총리는 혼혈‧동성애라는 개인적 특징 때문에 재임 기간 내내 인종차별과 동성애 혐오를 내세운 극우파로부터 살해 위협에 시달려왔다. 부총리로 재직 중이던 2021년엔 살해 위협 강도가 높아지면서 경찰로부터 이사를 권고받고 집을 옮기기까지 했다.

그의 연인은 심장전문의인 매튜 배럿 박사로 알려졌다. 이 둘은 2018년 당시 성소수자들의 접근을 금지한 미국 뉴욕의 성 패트릭의 날 퍼레이드에 참가해 함께 행진한 바 있다. 버라드커는 2022년 두 번째 총리직에 오른 뒤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아직 자녀를 가질 계획은 없다”면서 “우리는 아주 좋은 삶을 살고 있고 좋은 친구들도 많지만 가족을 가질 준비는 돼 있지 않다”고 전했다.  

지난 15일 미국 워싱턴의 부통령 관저에서 아일랜드 총리 버라드커와 그의 파트너 매튜 배럿이 미국 부통령 부부와 만남을 가졌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5일 미국 워싱턴의 부통령 관저에서 아일랜드 총리 버라드커와 그의 파트너 매튜 배럿이 미국 부통령 부부와 만남을 가졌다. 로이터=연합뉴스

버라드커 총리는 1979년 수도 더블린에서 아일랜드인 어머니와 인도인 아버지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도 정치인 가문 출신으로, 이사로 일하기 위해 1960년대 영국으로 이주했고, 당시 간호사로 일하던 어머니와 만나 결혼해 아일랜드에 정착했다. 부모의 영향을 받은 버라드커는 8살 때 이미 “보건부 장관이 되겠다”며 진로를 정했다고 가디언은 전했다.  

그는 고교 졸업후 더블린 트리니티칼리지 의대에 진학했고, 의사로 수련 과정을 밟았다. 당시 의대를 함께 다닌 동기 브렌든 오셔는 가디언에 “그는 친구들과 잡담을 하거나 여가를 즐기는 데 시간을 거의 내지 않았다”면서 “해야 할 일에 대해 고심하고, 결단한 일을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버라드커는 정치인이 된 뒤에도 특유의 무뚝뚝한 태도를 고수해, 일각에선 “거만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2018년 미국 뉴욕주에서 열린 성 패트릭의 날 퍼레이드 모습. AP=연합뉴스

2018년 미국 뉴욕주에서 열린 성 패트릭의 날 퍼레이드 모습. AP=연합뉴스

NYT는 ‘최초’ ‘최연소’ 타이틀을 다수 보유한 버라드커 총리의 존재 자체가 아일랜드의 급속한 현대화의 증거였다면서, 사임 발표에 대해선 “충격적인 일”이라고 전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버라드커 총리의 사퇴는 ‘유럽 극우화’의 상징적인 장면이라고도 평가했다. 데이비드 퍼렐 더블린대 정치학과 교수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극우 의제가 아일랜드에 뿌리 내릴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해왔는데, 안타깝게도 그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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