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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세계 최초 헌법에 '낙태 자유' 명문화..."전세계에 보내는 메시지"

중앙일보

입력

프랑스가 세계 최초로 '여성의 낙태할 자유'를 헌법에 명문화했다.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첨예한 이슈로 떠오른 상황에서 나온 소식으로, 전 세계에서 낙태권을 둘러싼 공방은 더욱 뜨거워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일(현지시간) 프랑스에서 여성의 낙태권을 명시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자 파리의 한 광장에 모인 낙태 찬성 지지자들이 기쁨을 나누고 있다. AP=뉴시스

지난 4일(현지시간) 프랑스에서 여성의 낙태권을 명시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자 파리의 한 광장에 모인 낙태 찬성 지지자들이 기쁨을 나누고 있다. AP=뉴시스

4일(현지시간) AP통신, CNN 등에 따르면 프랑스 의회는 이날 여성의 낙태할 자유를 명시한 헌법 개정안을 승인했다.

프랑스 상·하원은 이날 파리 외곽 베르사유궁전에서 합동 회의를 열고 표결을 진행해 찬성 780표, 반대 72표, 기권 50표로 헌법 개정안을 가결 처리했다. 표결에는 전체 의원 925명 중 902명이 참석했다. 개정안 통과를 위해서는 기권을 제외한 유효표(852표)의 5분의 3인 512명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데, 찬성표가 의결 정족수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 헌법 제34조에 '여성이 자발적으로 임신을 중단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을 법으로 정한다'는 조항이 추가된다.

AP통신은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의원도 찬성표를 던졌다"며 "개헌안이 통과되자 여성 의원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파리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대형 스크린으로 이를 지켜보던 수백 명의 시민도 환호성을 지르며 축하했다"고 보도했다. 반면 회의가 열린 베르사유궁전 인근에서는 낙태에 반대하는 이들의 시위도 열렸다.

프랑스에서는 1975년 저명한 여권 운동가이자 당시 보건 장관이던 시몬 베이유의 주도로 낙태가 합법화됐다. 이후 법이 여러 차례 개정돼 현재는 임신 14주까지 낙태가 허용된다. 따라서 이번 헌법 개정으로 실질적으로 바뀌는 것은 없다.

4일 프랑스 파리의 한 광장에서 의회의 낙태권 관련 표결 과정을 방송으로 지켜보고 있는 시민들. AP=뉴시스

4일 프랑스 파리의 한 광장에서 의회의 낙태권 관련 표결 과정을 방송으로 지켜보고 있는 시민들. AP=뉴시스

그런데도 프랑스 의회가 낙태권을 헌법에 명시하기로 결정한 건, 지난 2022년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임신 약 24주까지 낙태를 허용한 '로 대 웨이드' 판결(1973년)을 폐기한 영향이 크다. 당시 미 사회가 이 문제로 양분되자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이 사안을 중점 추진 과제로 삼겠다고 약속했고, 프랑스 의회는 낙태권을 '되돌릴 수 없는 권리'로 만들기 위해 헌법 개정을 준비해왔다.

프랑스 법학자 마틸드 필립게이는 AP통신에 "국민 대부분이 낙태를 지지하는 프랑스에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언젠가 극우 정부에 투표할 수 있고 미국에서 일어난 일 역시 일어날 수 있다"며 헌법 명문화의 취지를 설명했다.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양원 합동 회의를 주최한 야엘 브룬-피베 하원의장도 이날 연설에서 "우리가 달성한 모든 것이 사라지는 데는 한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며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즉각 환영의 뜻을 밝혔다. 투표 결과 발표 직후 X(옛 트위터)를 통해 "프랑스의 자부심, 전 세계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소회를 밝혔다. 또 오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헌법 국새 날인식을 공개 개최해 축하하겠다고 알렸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AFP=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AFP=연합뉴스

최근 지지율이 27%까지 하락한 데다, 농민 시위와 우크라이나 파병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마크롱 대통령은 낙태권 명문화를 '성과'로 내밀며 지지율 회복을 노릴 것으로 보인다.

마크롱은 지난 2022년 11월 상·하원의 개헌안에 표기된 문구가 각각 '자유'와 '권리'로 다른 탓에 헌법 개정이 어려워지자, 절충 문구인 '낙태할 자유 보장'을 제안해 양원을 설득하며 개헌 주도권을 가져온 바 있다. 폴리티코 유럽판은 "마크롱은 극우를 누르고 중도·진보 유권자를 포용하는 선택을 했다"며 "이를 정치적 디딤돌로 삼으려 할 것"이라 전망했다.

프랑스의 이번 헌법 개정은 다른 나라들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오는 11월 대선이 열리는 미국에서는 낙태권 이슈가 다시 한번 정국을 휩쓸 가능성이 있다. 미국에서는 '로 대 웨이드' 판결 폐기 이후 지금까지 14개 주가 낙태를 금지해 여성과 진보 성향 유권자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에 조 바이든 대통령은 낙태권을 보장하는 연방법 제정을 공약했고, 도널드 트럼프는 '15주 이후 낙태 금지'를 언급하며 보수의 표심을 공략하고 있다.

유럽연합(EU) 회원국 대부분은 낙태를 합법화하고 있다. 다만 조건은 제각각이다. 네덜란드는 임신 24주 이내의 낙태를 허용하고 아일랜드와 덴마크는 12주 이내로 하고 있다. 폴란드 등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일부 국가는 산모의 생명이 위험에 처한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금지하고 있다. 도이체벨레(DW)는 "지난해 여론조사에 따르면 EU 회원국 성인의 약 71%가 낙태 합법화를 지지하지만, 최근 들어 여러 국가에서 우익 세력이 그 규정을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등 갈등이 일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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