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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홍 봉합? 오후에 반전 일어났다…격해진 친윤·친한 비례갈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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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오찬 간담회에 함께 참석한 모습. 뉴스1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민의힘 지도부와의 오찬 간담회에 함께 참석한 모습. 뉴스1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갈등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20일 오전만 해도 2차 ‘윤·한(尹·韓) 갈등’의 발화점인 이종섭 주(駐)호주 대사와 황상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의 거취 문제가 풀리면서 갈등이 해소되는 듯했다. 그러나 오후 들어서 더 큰 불이 비례대표 공천 문제로 옮겨 붙었다. 친윤계와 한 위원장의 측근 그룹이 공개적으로 논박을 주고 받으면서 4·10 총선 이후에도 여권 내부 갈등의 뇌관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황상무 수석은 이날 오전 ‘언론인 회칼 테러’ 발언 논란의 책임을 지고 전격 사퇴했다. 14일 MBC 등 대통령실 출입 기자들과의 오찬에서 1980년대 언론인 회칼 테러 사건을 언급해 파장이 커지기 시작한 지 엿새 만이다. 이어 ‘수사 회피’ 의혹을 받고 있는 이종섭 대사가 곧 귀국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한동훈 위원장이 17일부터 사흘 연속 이 대사의 즉시 귀국과 황 수석의 사퇴를 요구해왔는데, 윤 대통령이 사흘 만에 전격 수용한 모양새였다.

당초 대통령실에서도 두 사람의 거취 문제를 오래 끌고가지 않겠다는 기류가 강했다.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이관섭 비서실장과 한오섭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은 한 위원장의 요구가 있기 전날인 16일 오후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로 윤 대통령을 찾아갔다. 이들은 ‘이종섭·황상무 리스크’에 대한 심상찮은 여론을 보고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원칙을 함부로 훼손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먼저 각 사안의 본질을 제대로 국민께 설명하자”며 회의는 끝났다. 비판 여론은 인지했으나, 여론 압박이나 정치권의 공세에 떠밀리듯 국정운영을 할 수 없다는 윤 대통령의 원칙론이 강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여론은 악화일로였다. 19일 국민의힘 선거대책위 발대식에 모인 수도권 후보들을 중심으로 “이대로 가면 총선은 망한다”며 황 수석 사퇴와 이 대사 귀국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증폭됐다. 결국 윤 대통령은 ‘황상무 자진 사퇴 수용, 이종섭 조기 귀국’이란 결론을 냈다. 이 대사는 21일 귀국해 다음달 10일 총선 때까지 한국에 머물 예정이다. 25일부터 열리는 호주 등 6개국 공관장 회의에 참석한 뒤 행사가 끝나도 출국하지 않는 형식이다. 여권 관계자는 “관련 회의가 갑자기 잡힌 것으로 안다”며 “이 대사 본인은 귀국 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신속한 조사를 촉구하면서 본인의 거취를 고민할 것”이라고 전했다.

여권 관계자는 “참모들 사이에서 ‘이대로 가면 총선 결과가 100석 미만이다’, ‘민심을 잘 받들어 총선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면 다 대통령 덕분일 것’ 같은 말이 계속 나왔다”고 했다. 19일 밤에는 “총선 직전에 갈등이 길어지면 선거 결과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고, 대통령에게 책임이 돌아갈 수 있다”는 우려도 다양한 경로로 윤 대통령게 전달됐다고 한다.

결정 과정이 길어지고 그 사이 당정의 이견도 부각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한 위원장의 공개 요구를 윤 대통령이 모두 수용한 모양새가 연출됐다. 1월에 불거진 1차 윤·한 갈등에 이어 2차 윤·한 갈등도 봉합되는 수순으로, 여권이 내분으로 공멸하는 장면은 피하는 그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전까지만 해도 대통령실에선 “총선을 코 앞에 두고 양측이 또 정면 충돌로 치닫는다면 이는 ‘윤·한’을 포함한 여권 전체의 공멸을 의미한다. 이제 갈등은 해소된 것으로 본다”는 말이 나왔다.

국민의힘 이철규 의원이 20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후보 명단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국민의힘 이철규 의원이 20일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후보 명단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반전은 오후에 일어났다. 친윤계 핵심이자 국민의힘 인재영입위원장 겸 공천관리위원인 이철규 의원이 갑자기 기자회견을 하면서 새로운 양상이 펼쳐졌다. 이 의원은 18일 국민의힘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후보 명단이 발표된 직후 “비대위원 2명이 비례대표에 포함되고, 호남 기반 정치인 배제가 실망스럽다”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며 한동훈 위원장의 사천(私薦) 논란을 제기했었다.

그는 이날 회견에서 “비례대표 공천은 그 진행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았다”며 “당초 국민의힘에서는 비례대표를 국민의힘 공관위에서 고심해서 결정한 이후 국민의미래로 이관하기로 뜻을 모았지만, 지도부에서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민의미래는 자매정당인 국민의힘과 한몸”이라며 “국민의미래 당직자 임명부터 공천 과정이 한 위원장 책임 하에 진행돼왔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비례대표 명단 논란의 핵심 책임자가 한 위원장이라고 명시한 것이다.

이는 친윤계와 대통령실 주변 인사들이 “한 위원장이 비례대표 후보 선정 과정에서 사실상 사천을 했다”고 반발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이라는 점에서 여권의 주목을 끌었다.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18일 비례대표 후보가 공개되기 10여분 전에야 명단을 받아본 윤 대통령은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특히 윤 대통령과 가까운 주기환 전 국민의힘 광주시당위원장이 사실상 당선권 밖인 24번에 배치된 데 대해 친윤계는 “윤 대통령과 가까운 인사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느낌”이란 반응을 보였다. 주 전 위원장은 후보 명단이 발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자진 사퇴했다. 여권에선 “윤 대통령과 교감한 결정 아니겠냐”는 분석이 나왔다. 여권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비례대표 명단을 본 뒤 ‘내가 사람을 너무 믿었다’는 취지로 배신감을 토로했다는 말도 들린다”고 전했다. 대통령실은 “비례대표 공천 ‘불개입 원칙’을 지켰다”고 강조한다. 이는 곧, ‘윤 대통령은 원칙을 지켰는데, 한 위원장은 원칙을 어겼다’고 해석되는 주장이다. 이철규 의원도 이날 회견에서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했다.

비례대표 공천 문제는 친윤계와 친한계의 진실공방과 감정싸움으로 번졌다. ‘이 의원이 일부 인사의 비례대표 공천을 요구했다’는 언론 보도와 관련해 그는 “당규에 근거해 비대위원장과 사무총장, 국민의미래 공관위원장에게 당을 위해 헌신해온 분들, 특히 호남 지역 인사, 노동계·장애인·종교계 등에 대해 배려 의견을 개진했다”며 “이것은 권한 없이 청탁한 게 아니라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책무”라고 밝혔다. 그는 특히 “어떤 분들은 왜 국민의힘 인재영입위원장이자 공관위원이 국민의미래 공천에 관여하느냐, 월권아니냐고 하는데 그렇다면 한 위원장도, 장동혁 사무총장도 모두 월권이고 모두 다 잘못된 것”이라는 말도 했다. 특히 “민주당 이재명과 같은 제왕적 정당 대표 아니잖느냐”며 “이재명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는 직격도 했다.

이 의원은 한 위원장의 최측근인 장동혁 사무총장을 별도로 겨냥한 발언도 했다. 그는 자신과 한 위원장이 고성을 섞어가며 말싸움을 했다는 언론 보도와 관련해선 “왜곡 보도가 난무하고 있다”며 “배후에 누가 있는지 기자들은 잘 알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사실상 장 의원을 겨냥한 것이다.

장동혁 국민의힘 사무총장이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한 모습. 뉴스1

장동혁 국민의힘 사무총장이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한 모습. 뉴스1

그러자 장 의원은 이 의원 회견 약 2시간 뒤에 입장문을 내고 반박에 나섰다. 장 의원은 “공천 과정에 외부 인사를 포함한 공관위원, 사무처 당직자들이 함께 참여했고 국민들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며 “당내 잡음으로 공천 결과 자체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그로 인해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원과 국민들이 전혀 바라지 않는 일”이라고 말했다. 한 위원장도 반박에 나섰다. “과거 한 위원장이 저에게 ‘비대위원은 적어도 비례 나오면 안 된다’고 했었다”는 이 의원의 말에 한 위원장이 주변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한 것이다.

한 위원장과 가까운 인사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 김경율 비대위원은 이날 오전 SBS 라디오에서 “(지난 18일 비례대표 문제를 제기한) 이철규 의원의 장문의 페이스북 내용은 번역하자면 ‘왜 내가 심으려는 사람이 비례대표 명단에 없냐’, 그렇게 요약할 수 있다”고 공개 저격했다. 또 다른 친한계 인사는 “이철규 의원이 자기 장사를 하려다 사고를 치고선 오히려 화를 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정치권에선 이번 갈등이 앞으로 여권의 큰 뇌관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뿐 아니라 이제 친윤계와 친한계마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모양새”라며 “총선 결과에 따라 후폭풍이 크게 몰아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날 밤 늦게 국민의미래 공관위는 비례대표 후보 명단을 일부 조정했다. 당초 명단에 없던 전북 4선 출신의 조배숙 전 의원과 당직자 출신인 이달희 전 경북 경제부지사가 각각 13번과 17번에 배치됐다. “호남과 당직자 출신을 배려하라”는 친윤계의 요구를 일부 반영한 것이다. 강세원 전 대통령실 행정관은 13번에서 21번으로 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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