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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유권자의 변심은 정치발전 도움될 수 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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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

선거는 민주주의의 엔진이기도 하고, 꽃이기도 하다. 그러나 매 선거의 지형과 유권자의 선택은 나라에 따라, 시대에 따라 무상하게 변한다. 영국도 금년이 총선의 해다. 내각제 영국의 경우 만약 내일 선거가 있다면 집권여당 보수당의 대패와 야당 노동당의 압도적 승리로 정권교체가 예상되고 있다. 현재 각종 지지율 조사에서 노동당이 보수당을 2배 이상 큰 차이로 앞서고 있다. 최근 이코노미스트지(誌)가 빅데이터를 이용해 영국 유권자의 투표 성향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흥미롭다. 과거 영국 정치 지형을 움직인 것은 주로 계층 간 성향 차이였으나, 이제는 언제 태어났냐는 세대의 차이가 더 부각되었다는 것이다. 지난 2019년 선거의 경우 45세를 분기점으로 노동당과 보수당 지지 성향이 갈렸으나, 금년 선거에는 이것이 70세 가까이로 올라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만큼 보수당이 당내 파벌 분쟁과 각종 스캔들로 국민의 신망을 잃은 반면 노동당은 케이 스타머 대표가 당을 보다 중도노선으로 끌어오면서 지지층을 확장한 때문으로 보고 있다.

정당 성과에 따라 투표 결정할 때
더 나은 정치·정책 기대할 수 있어
정치 바꾸려면 유권자가 바뀌어야
중도층 역할 강화되는 선거 되길

이는 또한 영국의 경우 1960년대 이후 각 선거에서 다른 정당을 선택하는 유권자의 비중이 점점 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열성 고정 지지자보다 선거 때마다 정당의 성과와 노선에 따른 스윙보트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에만 해도 유권자의 8분의 1만이 차기 선거에서 다른 정당에 투표했으나 1980년대에는 이것이 5분의 1로 늘었고, 금년 선거에서는 유권자의 5분의 2, 즉 40%가 지난번 선택했던 정당과 다른 정당에 투표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선거 결과를 유동적으로 만들고 정권 교체를 잦게 하는 면이 있을 수 있으나, 정당들로 하여금 더 좋은 정책과 정치로 경쟁하게 만들고, 집권당에 정신 바짝 차려 국가경영을 잘 수행하도록 하는 채찍으로 작용하게 된다며 이코노미스트지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열성 지지자들, 고정 지지자들이 견고할수록 정치인들은 핵심 지지층에 충성 경쟁을 하고, 국가를 위한 정치보다 당내 정치에 몰두하게 된다. 중도 성향 정치인의 설 자리는 좁아진다. 최근 미국의 정치가 점점 이런 모습으로 변해오면서 식자들은 미국 민주주의의 퇴행을 우려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금 세대보다 계층과 지역, 인종에 따라 투표성향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국의 선거지형도 조금씩 변하고는 있지만 지역별, 계층별 투표성향 차이가 고착돼 있다. 호남과 영남으로 갈라진 견고한 핵심지지층이 후보의 면모나 당의 정책보다 당의 이름만 보고 ‘묻지 마’ 투표를 하는 성향은 여전히 견고하다. 수도권에서는 소득 수준이 다른 강남과 강북이 투표 성향의 큰 차이를 보인다. 지난 총선의 경우 광주·호남에서 지금의 여당은 한석도 얻지 못했고, 대구·경북에서는 지금의 야당이 한석도 얻지 못했다. 호남 주민이 대부분 진보적일 수 없고 영남 주민이 대부분 보수적일 수 없을진대 이러한 투표 성향은 민주주의의 발전, 국가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 정당의 정책경쟁, 정치의 질 경쟁을 견인하지 못하고 상대에 대한 비방, 끌어내리기를 부추기게 된다. 국가의사 결정에서 합리적 중도층의 역할이 제한된다.

또한 한국은 세대별 정치성향 차이도 두드러진다. 30·40대는 진보성향이, 60대 이상은 보수성향이 강하다. 20대와 50대는 뚜렷한 성향을 규정하기 어렵다. 젊은 층은 고령층보다 성장과 사회구조 개혁, 기회의 균등, 주거와 환경, 교육 및 육아 등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며 미래지향적 투표를 하는 성향이 강하다. 이번 선거 유권자의 구성은 20~40대와 50대 이상 유권자의 비중이 거의 비슷하다. 아마도 이런 균형은 이번 선거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차기 선거에서부터는 50대 이상의 비중이 훨씬 커지게 된다. 반면 여태까지의 투표율을 보면 20~40대가 50~70대보다 10% 포인트 이상 낮다. 유럽과 일본의 경험을 보면 유권자가 고령화될수록 경제사회 개혁이 정체되고 현상유지적 정책이 선호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제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이번 총선에서 우리 유권자들이 자신의 출신 지역과 계층, 그리고 과거 투표한 정당에 고착되지 않고, 지난 4년 어떤 정당이 더 좋은 정책과 합리적 정치를 추구해 왔는지를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해보고 정당과 후보를 선택했으면 한다. 국민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어느 당이, 어떤 정치인이 더 좋은 발상과 더 많은 노력을 해왔고, 할 것인가를 보고 투표하기를 바란다. 또한 정당과 후보자들이 젊은 세대와 중도층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 정책으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그들을 더 많이 투표장으로 향하게 하는 노력들을 했으면 좋겠다.

유권자가 바뀌어야 정치가 바뀐다. 좋은 정치, 나쁜 정치, 미래를 일으키는 정책, 미래를 갉아먹는 정책-. 국가가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되는가는 민주주의하에서 결국 국민의 책임이다.

조윤제 서강대 명예교수·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