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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녹색 에너지 전환, 소비자의 결단 없인 불가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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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내권 초대 기후변화 대사

정내권 초대 기후변화 대사

강원도 고성에 지난달 쏟아진 폭설의 적설량이 146.4㎝를 넘으면서 기상청 향로봉 측정소의 측정 한계치를 넘었다. 사상 처음 관측 장비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최근 미국에서는 해수 온도의 이상 상승에 따른 ‘대기의 강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미국 서부부터 중부까지 기록적인 폭설과 폭우가 동시에 발생해 큰 피해를 줬다. 북유럽은 수은주가 영하 30도 아래로 내려갔고, 중국 만주 지역은 심지어 영하 50도 이하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런 사례들은 지구촌 곳곳을 강타하고 있는 ‘기후 위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지난해는 관측 사상 가장 더웠던 한 해였고, 지난 1월은 가장 더운 1월이었다. 기후변화가 이미 국제적 합의 한도인 섭씨 1.5도를 넘었다는 관측 통계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 큰 피해 기후재난
파리협정은 정부·기업에만 초점
에너지 소비자들 방관자로 남아
‘나부터 비용 내야’ 의식전환 절실

그러나 가속하는 기후 위기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대응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말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열린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 28)는 화석연료 전환에 합의했으나, 2015년에 서명한 ‘파리 기후 협정 체제’에 따라 각국이 2018년 서약한 감축 목표치들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지 않다고 평가했다.

현행 파리 기후 협정 체제는 ‘국가의 자발적 기여(NDC·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에 기반을 둬 정부 목표치를 설정하고, 기업의 이행 책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정작 에너지를 소비하는 소비자들이 방관자로 남아 있다 보니 기후 위기 대응이 실질적 성과를 거두기 쉽지 않다.

탄소 중립과 녹색 에너지 전환을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이 주도하는 현재의 하향식 기후 체제에서 벗어나 소비자가 참여하는 상향식 기후 체제로 전환이 시급하다. 하지만 녹색 에너지 전환의 비용을 소비자들에게 분담시키는 데 따른 정치적 부담과 사회적 저항을 각국 정부들이 예외 없이 우려하는 것이 현실이다. 유류세 인상에 항의한 2018년의 프랑스 노란 조끼 시위, 가스 가격 인상에 항의한 2022년 카자흐스탄 시위 등이 아직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기후 위기가 날로 심각해지면서 기후 재난을 자신의 생존 문제로 인식하고 자신을 지구 시민으로 자각하는 신인류 세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되고 있다. 이들은 녹색 에너지와 무탄소 배출(Carbon Free) 제품 구매에 추가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소비자의 48%가 추가비용 지불 의사를 갖고 있다고 응답했다.

문제는 이들의 이런 참여 의사를 행동으로 실천할 기회를 제공하는 시스템이 없다는 점이다. 모든 소비자에게 일률적으로 녹색 에너지 전환 비용을 분담시키는 것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고려할 수 있는 방안은 추가 비용 지불 의사를 가진 소비자들부터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환경을 생각해서 추가 비용 지불 의사를 가진 것은 개인 소비자들만이 아니다. 국내외 기업들도 자발적으로 ‘RE100 운동’에 속속 참여하고 있다. 기업이 필요한 전력을 2050년까지 전량 재생에너지 전력으로 구매 또는 자가생산해 조달하겠다는 RE100 운동은 비영리 단체 클라이밋그룹(Climate Group)이 2014년 출범시켰다.

자발적 참여 시스템의 핵심은 화석 에너지와 녹색 에너지의 가격 차별화다. 기후 위기를 걱정하는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더 비싼 ‘녹색 전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전기 가격을 더 비싼 녹색 가격과 일반 가격으로 구분해 소비자들에게 선택권을 줘야 한다. 적자가 누적된 한국전력이 재생에너지를 비싸게 구매해 소비자들에게 싸게 판매하는 현행 방식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나부터 자발적으로 녹색 에너지 전환 비용을 부담하는 ‘미 퍼스트(Me First) 운동’과 함께, 국가의 자발적 기여(NDC)를 뒷받침할 ‘개인의 자발적 기여(PDC)’ 인식의 확산이 필요하다.

11월 대선에 출마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대선 공약 1호’로 파리 기후 협정 탈퇴를 천명한 상황이다. 국제사회에 영향력이 큰 미국이 반환경적 정책으로 회귀한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 정치인들에게만 기후 위기 대응을 맡길 수 없다. 정부와 기업을 비판하고 책임을 추궁하는 환경 운동만으로는 탄소 중립을 구현하기 어렵다.

소비자인 나부터 녹색 에너지 전환의 비용을 부담하는 사회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이런 운동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할 때 비로소 탄소 중립의 목표 실현이 가능할 것이다. 전 세계 어디에도 나부터 녹색 에너지 전환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사회 운동은 아직 없다. 한국이 나부터 자발적으로 책임을 분담하는 새로운 기후 운동을 선도해 ‘기후 한류’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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