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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5월 지나면 아예 못 볼 수도…금사과도 가을까지 속수무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달 과실 물가 상승률과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 간 격차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사진은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에서 판매 중인 사과. 연합뉴스

지난달 과실 물가 상승률과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 간 격차가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사진은 서울 송파구 가락시장에서 판매 중인 사과. 연합뉴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영등포청과시장. 예년 같으면 과일을 박스째 사러 온 차들이 가게 앞 도로에 줄지어 있었겠지만 이날은 한산하기만 했다. 상인들은 손님이 없어 졸거나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이 빠진 것처럼 텅 빈 가게들도 보였다. 편정수 상인회장은 “30년 장사하면서 과일 가격이 이렇게 비싸지는 건 처음 봤다”며 “150여 개 점포 중 올해 들어 문 닫은 곳이 10개는 된다”고 말했다.

한 가게에 들어서자 크고 빛깔 좋은 사과들 앞 ‘3개 만원’ 팻말이 눈에 띄었다. 1년 전에는 ‘5개 만원’이었다. 사과 40개가 든 10㎏짜리 박스는 한개 1000원꼴이지만 ‘쥬스용’이라고 적혀 있었다. 과일 장수 A씨는 “그건 잘 안 팔린다. 손님들이 양보다는 질 좋은 걸 찾는다”고 말했다. 이 시장 사과 가격은 개당 1000~5000원이다. 시세 변동이 커 매일 가격이 달라지는데 죽 오름세라고 했다.

취재 도중 중년 여성이 30개짜리 사과 한 박스(10㎏)를 9만원에 샀다. 이 여성은 “선물용”이라며 “내가 먹을 사과는 전보다 덜 사고, 하나 먹던 걸 반 잘라서 아껴 먹는다”고 말했다. 상인 부부가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교대로 가게를 지키는 덕에 단골 발길은 이어지지만, 산지 가격부터 센 터라 마진을 거의 붙일 수 없어 상인들도 “남는 게 없다”고 했다. 한 개씩 끼워주던 덤도 싹 사라졌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물가 3% 오를 때 과일값 40% 올라 

13일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에 따르면 사과(후지·상품) 10kg당 도매가격이 지난 1월 17일(9만740원) 사상 처음으로 9만원을 돌파한 데 이어 같은 달 29일(9만4520원)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이달 들어서도 9만원선을 웃돌고 있다. 통계청 집계도 비슷하다. 지난달 과실물가 상승률은 40.6%로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3.1%)보다 37.5%포인트 높았다. 과실물가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85년 1월 이후 가장 큰 격차다. 같은 기간 사과와 배·귤의 물가 상승률 역시 각각 71%, 61.1%, 78.1%로 높았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작년 수확 전부터 냉해·병충해 피해로 사과 수확량이 줄어 가격이 오르자, 정부의 물가 안정화 지원이 ‘금사과’에 집중되면서 수요·공급이 더 엇갈려버렸다”며 “정부 지원으로 최종 판매 가격이 낮아지면서 산지 가격은 비싼데도 수요가 몰려 저장량이 작년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제 사과가 없으니 수요·공급과 관계없이 가을 햇사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골든타임’이 지난 현 상황에선 묘책이 없다는 얘기다. 작황이 좋지 않아 품질 미비로 저장성이 현저히 떨어진 배도 마찬가지다. 이 관계자는 “5월이 지나면 시장에서 아예 배를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며 “다만 다음 둘째 주부터 딸기·참외·토마토 등 대체 과일의 물량이 늘게 되면 전반적인 과일 가격은 좀 내려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인들 역시 “자두·복숭아 같은 제철 과일이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검역 문제로 그동안 하지 않았던 ‘사과 수입’을 검토했지만 절차 마련에 장기간 소요된다며 당장은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지난 11일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청과시장 앞. 과일을 사러오는 손님이 줄어 길이 한산하다. 최은경 기자

지난 11일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청과시장 앞. 과일을 사러오는 손님이 줄어 길이 한산하다. 최은경 기자

일부에서 가격 상승을 이용해 수수료 이익을 더 취하려는 중도매인 등이 시세 폭등을 부추겼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업계는 이런 움직임이 일부 있지만 수수료 자체가 크게 오른 건 아니어서, 주요 원인은 아니라고 봤다. 시장에서 만난 상인 역시 “유통의 문제였다면 이 시점에 농가들이 쟁여놓은 사과를 풀 텐데 안 내놓지 않나. 정말 사과가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농가 고령화와 이상 기후 등을 감안해 장기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최근 농업기술연구계가 시도하는 ‘사과 눕혀 키우기(다축 재배)’가 대표적이다. 사과나무는 높이가 4~5m인 데다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 사다리차 없이 수확하기 어렵다. 큰 키 때문에 기상 이변 대비도 쉽지 않다.

다축 재배는 큰 줄기를 수평으로 뉘어 기르는 방식으로 이 줄기 마디마다 새 가지가 수직으로 올라와 축을 만든다. 키를 낮추니 햇빛이 고루 들어 사과 수확량이 늘고, 품질도 높아지는데 수확은 더 쉽다. 우박, 이상 고온에 대비한 시설 설치나 제초·수확 로봇 활용도 가능하다. 이 재배는 주요 사과 산지인 경북·강원 등에서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각각 전체 농지의 0.7%, 1.5%에 불과할 만큼 아직은 미미하다.

지난해 강원도에서 다축 재배 방식으로 기른 사과 나무. 가로로 길게 누운 큰 가지 위로 작은 가지들이 올라와 축을 만든다. 사진 강원농업기술원

지난해 강원도에서 다축 재배 방식으로 기른 사과 나무. 가로로 길게 누운 큰 가지 위로 작은 가지들이 올라와 축을 만든다. 사진 강원농업기술원

‘사과 눕혀 키우기’ 장기 대안도

정햇님 강원농업기술연구원 농업연구사는 “기술 개발 초기지만 이 방향이 가장 적합하다고 봐 연구와 전파에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농민들 관심도 높은 편이다. 농촌경제연구원 조사 결과 농가 490곳 중 80%는 다축 재배를 알고 있다고 답했다. 다만 초기 비용과 기술 신뢰성 문제로 실제 재배 방식을 바꾸겠다는 응답은 27%에 그쳤다.

유통계는 과일에서 시작한 애그플레이션(농산물 가격 인상에 따른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자 연중 할인 행사로 물가 안정화 기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마트는 오는 15∼21일 제철 신선 먹거리를 최대 50% 할인 판매한다. 롯데마트는 14∼17일 엘포인트 회원을 대상으로 특유의 저장 방식으로 신선도를 높인 ‘CA 저장양파’(㎏/망)를 3990원(행사카드 결제 시), 14~20일 정상품보다 크기가 20% 작은 상생무(900g)를 990원에 내놓는다.

앞서 쿠팡도 딸기 120t(톤), 오렌지 180t, 참외 150t 등 과일 450t을 오는 17일까지 ‘와우회원’에게 최대 30% 할인된 가격으로 제공한다고 밝혔다. 한판 딸기(대과·500g)는 6990원, 퓨어스펙 고당도 오렌지(3kg) 1만5900원, 성주 당도 선별 참외(1.2kg) 9800원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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