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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평가, 공팔과이라 해도 인색하단 생각 들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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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0호 28면

이종찬 광복회장

이종찬 광복회장이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 내 3·1독립선언서 앞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적은 다대하고, 그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기웅 기자

이종찬 광복회장이 지난 6일 서울 여의도 광복회관 내 3·1독립선언서 앞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적은 다대하고, 그에 대한 균형 잡힌 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기웅 기자

일전에 만난 이종찬 광복회장이 책자 한권을 건네주었다. 지난 1월 30일 광복회가 국가보훈부와 함께 주최한 ‘독립운동가 이승만 학술 대토론회’ 발표 원고를 모은 것이었다. 이승만이 남긴 독립운동가로서의 뚜렷한 공적과는 별개로 대통령 재임 시절 친일 청산에 미흡했다는 평가가 있는 것도 사실인 터라, 광복회 차원에서 이승만을 기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직후 개봉된 영화 ‘건국전쟁’이 관람객 114만명을 돌파하며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고, 이승만기념관 건립 모금액이 지난달 100억원을 넘어서는 등 이승만 재조명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그래서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지난 6일 서울 여의도의 광복회관으로 이 회장을 찾아갔다. 이 회장은 전재산을 팔아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1867~1932)의 손자로, 임시정부의 마지막 거점인 중국 충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초대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시영(1869~1953)이 그의 종조부여서 어릴 적부터 이승만을 직접 만날 일이 많았다.

지난 1월 정부가 이승만 전 대통령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고 이에 발맞춰 광복회가 학술토론회를 열었습니다.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에게 직접 요청했지요. 사실은 많이 늦은 겁니다. 1992년부터 매월 한 명씩 독립운동가를 선정하는 사업을 해 그 숫자가 500명에 이르는데 이제서야 이 전 대통령이 포함됐으니 말입니다. 일각에선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평가절하하는 시각이 있는데 잘못된 생각입니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우당을 비롯한 무장투쟁론자도 있고, 안창호 선생처럼 힘을 기르고 자기혁신을 해야 한다는 분도 있었고, 이 전 대통령과 같은 외교 노선도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승만의 독립운동 공로는 참으로 다대합니다. 하나만 말할게요. 미국 전략사무국(OSS)과의 군사작전을 광복군보다 먼저 추진해 한국인 대원(장석균 등)을 뽑아 보낸 사람은 이 전 대통령이에요. 포로로 가장해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침투시키는 공작도 했죠.”

직접 본 이승만, 도포자락 휘날리며 위엄

이승만의 생애 전반에 대해선 어떻게 평가합니까.
“중국에 가면 천안문 광장에 마오쩌둥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지 않습니까. 마오 사후 중국 지도자가 된 덩샤오핑이 마오의 생애를 ‘공칠과삼(功七過三)’이라 규정했죠. 이승만은 ‘공팔과이(功八過二)’라 해도 인색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
대표적 공적 세 가지만 꼽는다면요.
“첫째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결단입니다. 많은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정이 불가피하다는 결단을 내렸죠. 단정이 분단 고착으로 이어졌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이승만이 단정 결심을 하고 ‘정읍발언’을 할 때 이미 북한은 소련의 지령을 받아 소비에트화하고 있던 시점입니다. 당시 북한 내부의 정확한 정보를 얻기란 쉽지 않았을텐데 이 전대통령은 날카로운 정세 감각으로 그들의 속셈을 알아차린 겁니다. 그랬지 않았다면 한반도 전역이 공산화되었을 겁니다. 둘째는 탁월한 외교 업적입니다. 6·25 때 나라를 지켜 낸 것도 그 덕분 아닙니까. 세번째는 한미방위조약입니다. 이승만은 미국을 좋아하고 미국을 이용하려 했지만, 미국에 대한 불신도 깊었습니다. 강대국 미국이 그토록 안하려던 일을 밀어붙여 이뤄낸 거죠. 이 조약으로 70년간 동북아 평화를 유지하고 경제발전을 이루는 토대가 된 것입니다. 그의 비범함을 꼽자면 한이 없습니다.”
더 말씀해 주신다면.
“이승만이 청년 시절 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이란 책이 있습니다. 거기에 통상으로 나라 힘을 길러야 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지금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 당시는 성리학이 판을 치던 세상이었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 서열 가운데 꼴찌였던 ‘상’으로 힘을 기르자고 한 겁니다. 대단한 선각자죠. 그런 모습들이 다 잊혀졌어요, 정치적인 이유로.”
김구가 1948년 8월 15일 쓴 ‘한운야학(위)’에는 ‘임시정부 주석(왼쪽 )’이라고 달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 이후에 쓴 ‘서해맹산(아래)’ 등의 글씨에서는 ‘73세 백범 김구(오른쪽)’라고 적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이를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의 소임을 다하고, 이승만의 정부 수립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중앙포토]

김구가 1948년 8월 15일 쓴 ‘한운야학(위)’에는 ‘임시정부 주석(왼쪽 )’이라고 달았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 이후에 쓴 ‘서해맹산(아래)’ 등의 글씨에서는 ‘73세 백범 김구(오른쪽)’라고 적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이를 ‘김구 선생이 임시정부의 소임을 다하고, 이승만의 정부 수립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중앙포토]

집안 내력도 있고 해서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만날 기회가 많았을 것 같은데요.
“가장 먼저 뵌 것은 무교동에 있던 성재 할아버지(이시영) 댁에서였습니다. 두 분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죠. 정부수립식이 있던 1948년 8월 15일 그날에도 어른들을 따라 이화장으로 갔습니다. 12살 제 눈에도 도포자락 휘날리는 이 박사의 풍모에 카리스마가 느껴졌습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뵀지만 마지막은 1953년 부산 동래에서였습니다. 성재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문상을 왔습니다. 그 때 상주들에게 ‘성재 형님이 부럽다. 이렇게 자손이 많으니 굉장히 다복한 삶을 사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서 대통령의 내면적 쓸쓸함이 전해져 왔습니다. 이 얘기는 친구 강석이(이 대통령의 양자 이강석과 이종찬 회장은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에게도 차마 하지 못했어요. 친아들이 아닌 강석이가 혹시나 상처를 받을까봐요. 동양적 가족관이라고 할까요, 친혈육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는 이야기죠.”
요즘 재평가 운동에 힘을 보태고 있나요.
“물론입니다. 과거에도 이승만을 기리는 사업이 아주 없지는 않았습니다. 저만 해도 이승만 숭모회 고문을 예전부터 맡아왔으니까요.”
최근 개봉한 ‘건국전쟁’을 보셨나요.
“첫날 가서 봤지요. 이승만을 형편없이 깔아뭉갠 ‘백년전쟁’과 같은 것에 맞서려는 감독의 용기를 대단히 높이 평가합니다.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눈물 흘리는 것도 이유가 있죠, ‘아 내가 여태까지 이승만을 잘못 알고 있었구나’라는 깨우침을 주니까요. 하지만 작품 내용에서는 아쉽고 불편한 대목도 있었습니다.”
어떤 부분입니까.
“이승만과 백범을 갈라치기하는 건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이승만을 추켜세우기 위해 백범을 깎아내려서도 안되지만 그 반대도 안됩니다. 이승만과 백범을 원수지간인 것처럼 그리는 건 사실과 맞지 않아요. 백범의 비서 중에 선우진이란 분이 있었어요. 그 분이 백범을 수행하고 지방 도시를 가니 환영객들이 ‘국부 김구 주석’이라며 만세를 부르는데, 백범이 그랬다는 거에요. ‘이승만이 국부인데, 나라에 국부가 두 명 있을 수 없다’며 말렸다는 거죠. 백범은 동향 선배이기도 한 우남 이승만을 존중했습니다.”
백범이 이승만 주도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백범이 경교장에 들어가 쓴 글씨를 보면 정부 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을 전후로 스스로에 대한 표현이 달라집니다.”

이 회장은 “내가 발견한 것”이라며 백범의 휘호가 담긴 사진 두 장을 보여주었다. ‘한운야학(閒雲野鶴·한가로운 구름 속 들판 위의 학)’과 ‘서해맹산(誓海盟山·바다에 맹세하고 산에 다짐한다)’이란 글씨가 백범의 서체로 적혀 있었다. 이 회장은 “백범은 정부 수립 직전에 쓴 한운야학에는 ‘임시정부 주석’이라고 썼습니다. 그 이후에 쓴 서해맹산에는 직함 없이 ‘73세 백범 김구’라고만 썼죠. 무슨 말이겠습니까.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했으니 이제 임시정부는 소임을 다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했다. 그의 우려는 더 이어졌다.

“‘김구-유어만 대화록’도 그렇습니다. 남북협상차 평양에 갔다온 김구가 북한의 남침 의도를 알고도 방관했다는 여운을 남깁니다. 우선 그 대화록 자체에 대한 검증이 필요합니다. 유어만이 어떤 목적으로 대화록을 이화장에 남겼을까요. 문서 전체를 보면 백범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의도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백범이 공산주의를 싫어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정치학계가 아직 이 문서에 대한 가치를 쳐주지 않고 있는 것도 검증이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겠죠. 더 연구하고 토론한 다음에 정확한 해석을 해야죠.”

2 감추려 하면 8이 죽어, 공과 함께 봐야

이승만 재평가 작업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면 좋겠습니까.
“앞에서 이 박사를 공팔과이라고 했죠. 그런데 2를 감추려고만 하면 8이 다 죽어버리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 공과 과를 함께 보면 됩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가 기념관 건립 추진을 이끌고 있는데 잘 하시리라고 봅니다. 미국 닉슨 대통령 기념관에 가보셨나요. 거기에 닉슨 최대의 오점인 워터게이트 상설관이 있는데 ‘불명예가 명예가 되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잘못된 이승만 평가는 시계 바늘로 따지면 9시 방향이었습니다. 그걸 바로잡는다고 당겨서 3시 방향으로 돌진하면 안됩니다. 12시 방향으로 정확하게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그게 바로 이승만 박사를 제대로 모시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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