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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사람들이 만든 베이징 의류산업 메카....그 생생한 속살과 역사[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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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는 공동체
샹뱌오 지음
박우 옮김

글항아리

중국 베이징의 저장촌은 동남부 저장성 출신들이 모여 살면서 이렇게 불리게 된 지역이다. 1980년대 불과 몇 가구로 시작해 10년 만에 거주민이 10만명까지 늘었다. 그 원동력은 의류산업. 대개 원래 옷을 만들던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이곳에 와서 알음알음 방법을 익히는 한편 노점으로 시작해 상점 매대 임대 등으로 판매에 나섰다. 저장촌은 중국 북부·동북부 전역에 중저가 의류를 공급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가죽 재킷이 열풍을 불러일으킨 90년대 초부터는 러시아·동유럽 등 해외 상인들까지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국 베이징의 저장촌 중심 거리 모습. . [사진 글항아리]

1990년대 중국 베이징의 저장촌 중심 거리 모습. . [사진 글항아리]

이 책은 베이징대 학생이었던 저자가 1992년부터 6년 동안 이곳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쓴 석사논문. 2000년대 해외에도 책으로 출간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 명성은 출판사 의뢰로 번역을 맡은 박우 한성대 교수가 박사 논문을 쓸 때 참고한 책 두 권 중 하나로 이 책을 꼽는 데서도 짐작된다. 저장성 출신이기도 한 저자는 이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었다. 현재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사회인류학연구소장이다. 그는 2000년대 들어서도 저장촌을 여러 차례 찾았는데 그런 20년의 변화는 서문에 담겨 있다.

저장촌의 본격적 이야기는 두 자매와 그 남편들과 자녀들, '라오쓰'라 불리는 고용인들로 구성된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집이 곧 작업장이고, 언뜻 봐서는 사장과 고용인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옆집에서 부자재를 빌려오거나 심지어 바쁠 때 밥을 얻어오기도 하는데, 당시 농촌에서는 보기 힘든 일이다. 저자는 과연 누가 제일 먼저 저장촌에 온 사람인지에 대한 세 가지 이설을 포함해 저장촌의 형성 과정을 짚고 이후 확장된 모습을 펼쳐나간다.

삼륜차는 저장촌의 가내공방에서 생산한 옷을 인근 시장으로 운반했다. [사진 글항아리]

삼륜차는 저장촌의 가내공방에서 생산한 옷을 인근 시장으로 운반했다. [사진 글항아리]

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공동체가 돌아가는 방식으로 저자는 다양한 관계의 조합인 '계'를 주목한다. 두 자매처럼 이곳 사람들에게 가족, 친척, 동향 출신 등 이른바 '친우권'의 관계가 중요하리란 건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끼리만 일을 한 건 아니었다. 사업적 협력관계인 '사업권'은 '친우권'과 중첩되면서도 다른 영역. 저자는 이런 분리가 지니는 의미와 함께 저장촌에 늦게까지 대기업이 출현하지 않은 이유 등에 대해서도 나름의 설명을 들려준다.

저자에 따르면 중국에서 '관계'는 '너와 나'가 아니라 '너의 관계망'과 '나의 관계망' 사이의 일이다. 우리말 번역은 '관계'를 중국의 특수한 현상으로 보지 않는 이 책의 관점을 따라 굳이 '꽌시'로 옮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책에는 관계가 작동하는 생생한 양상이 여러 구체적 사례를 통해 풍부하게 전해진다. 사업상의 거래나 분쟁은 물론 강도 같은 범죄 피해나 싸움에 대처하는 방식 등도 포함해서다. 저장촌에는 저자가 '거물'이라고 부르는 영향력 큰 인물도, 몰려다니며 나쁜 짓을 하는 젊은이들의 '패거리'도 등장한다.

베이징 저장촌 최초의 의류도매시장이었던 타오위안시장. [사진 글항아리]

베이징 저장촌 최초의 의류도매시장이었던 타오위안시장. [사진 글항아리]

특히 저장촌 의류산업의 면면과 맞물리는 생활상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오늘 주문을 받으면 밤새워 완성하는 빠른 속도는 기본이었던 듯싶다. 해외 상인이 요구하는 추가 물량을 동네를 돌며 불과 몇 시간 만에 마련하는 모습도 나온다. 저장성과 말이 달라 의사소통부터 불편한 베이징의 공식 의료기관 대신 진료소나 유치원도 생겨난다. 저장성에서 만들어온 짠지와 간장·식초를 포함해 식재료를 파는 시장은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한데 물가가 비싸 베이징 사람들은 여기서 장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기차표와 비행기표가 동나는 춘절 직전에도 저장촌에서는 표를 구할 수가 있었다. 전세기를 준비해 웃돈을 받고 표를 파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저장촌은 화려한 미용실 앞에 쓰레기더미가 쌓여있는 곳이기도 했다. 1995년에는 중앙 정부와 베이징 시에서 대규모 철거작업에 돌입한다. 저장촌 사람 중에는 베이징 바깥 지역에 새로운 저장촌을 만들려는 움직임도 벌어진다. 한데 저자의 예상과 달리, 당국의 대응은 이내 느슨해졌고 철거 지역은 놀랍게도 불과 몇 달 만에 재건된다.

중국의 여러 제도를 비롯해 이 책에는 속속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대목도 적지 않지만, 그럼에도 읽고 있노라면 흔히 '개혁개방'으로 뭉뚱그려 부르는 시기의 생생한 속살을 보는 듯하다. 저자는 저장촌 같은 곳이 생겨난 계기를 문화혁명에서 찾는다. 혼란기에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고향 바깥에서 돈벌이를 도모하기 시작한 흐름은 저장촌 초기 이주민들의 이력에도 드러난다. 저자가 전하는 저장촌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면서 동시에 해외 상인들과 거래할 만큼 개방적이었다. 그는 '경계를 넘는 공동체'라고 표현한다. "사회의 모든 부분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면서 정해진 총체적 사회 질서의 외부에 놓여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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