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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5 "의사가 없다" 2차병원 "병상이 없다"...응급환자 핑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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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전공의 파업 사흘째 이른바 ‘빅5’(서울대·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아산·서울성모) 등 상급종합병원에서 환자 진료 및 입원을 거부하는 사례가 잇따르는 가운데, 그보다 작은 1·2차 병원에서도 “전공의 파업으로 진료가 어렵다”, “중증 환자는 대학 병원으로 가라”며 서로 환자를 떠넘기는 ‘핑퐁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2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외래항암약물치료센터 접수창구에 '대기 시간 5시간' 팻말이 세워져 있다. 이아미 기자

2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외래항암약물치료센터 접수창구에 '대기 시간 5시간' 팻말이 세워져 있다. 이아미 기자

22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 앞, 생후 1개월짜리 아이를 둔 30대 김모씨가 119 구급대원에게 응급실 상황을 전해 듣고는 불안과 안도가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가 밤새 열이 나고 숨 쉬는 것도 힘들어해 폭설이 내린 새벽부터 여러 병원 응급실을 전전했지만 오전 10시쯤이 돼서야 치료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어제 새벽부터 고민하다가 큰 병원은 못 들어갈 것 같아서 2차 병원에 갔는데 거기선 ‘큰 병원을 가야 한다’고 해서 다시 세브란스 응급실로 왔다”며 “전공의 파업만 아니었어도 굳이 2차 병원에 가지 않고 빨리 여기(세브란스병원)로 왔을 텐데 괜히 시간만 허비했다”고 말했다.

정부와 지자체가 비상진료체계를 가동한 공공병원에서도 응급 진료 거부가 발생했다. 이날 아침 94세 아버지가 호흡 곤란이 와 서울대병원이 운영하는 서울시립 보라매병원 응급실로 향하던 유모(68)씨는 ‘자리가 없어 안 받아준다’는 구급대원의 말에 진땀을 빼다 인근 관악구 양지병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유씨는 “아버지가 25년째 보라매병원에 다녔는데 그동안 진료받은 기록이 없어서 응급 담당 의사도 난감해했다”며 “연세가 많고 집중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 더 큰 병원을 찾으라는데 파업 때문에 여의치 않은 상황인 것 같다. 믿었던 공공병원까지 환자를 거절하니 불안하고 막막하다”고 전했다.

사진 보라매병원 홈페이지 캡처

사진 보라매병원 홈페이지 캡처

보라매병원은 20일 홈페이지에 “환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비상진료체계를 가동했다”면서도 “보라매병원 소속 전공의들이 근무를 중단해 병원 진료에 일부 차질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공지했다. 같은 2차 병원인 여의도 성모병원 관계자는 “2차 병원이긴 하지만 대학병원이라 수련의가 많은 ‘빅5’ 상황과 다를 바 없다”며 “여기도 성애병원 등 인근 2차 병원이나 요양병원 쪽으로 수술 환자를 전원시키는 처지”라고 말했다.

실제 서울 내 다수 2차 병원은 상급종합병원 전공의 파업의 여파로 진료 여력이 없었다. 적십자병원은 전공의 파업 전 하루 평균 560건의 외래 진료를 진행했으나, 파업 이후 매일 30~40건씩 진료가 늘었다고 한다. 22일 오후 찾은 적십자병원 내과에선 4명의 교수가 외래 진료를 받고 있었는데 교수당 약 10명의 환자가 대기 중이었다. 대기 중이던 박모(53)씨는 “원래 강북삼성병원에서 위궤양 수술을 받았는데 요즘 다시 속이 쓰리고 문제가 생긴 것 같아 왔다”며 “동네 병원은 못 믿겠고 삼성병원에 가자니 파업 때문에 진료가 밀릴까 봐 이곳으로 왔다”고 말했다.

다리 골절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윤모(81)씨가 퇴원 예정일보다 6일 빠른 20일 정오쯤 아내와 함께 짐을 챙겨 조기 퇴원하고 있다. 이아미 기자

다리 골절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윤모(81)씨가 퇴원 예정일보다 6일 빠른 20일 정오쯤 아내와 함께 짐을 챙겨 조기 퇴원하고 있다. 이아미 기자

적십자병원 관계자는 “중증 환자는 수술 장비 등이 부족하거나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며 “수술 이후 드레싱이나 항생제 투여 정도가 필요한 환자만 3차 병원으로부터 전원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2020년 파업 사태에 비춰봤을 때 경증 외래까지는 버틸 수 있어도 파업이 장기화되면 중증 환자는 길바닥에 누울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때문에 실제 강원 원주의 한 병원에서는 최근 입원 환자와 보호자에게 ‘의료파업으로 인해 응급상황 발생 시 상급병원 전원이 불가할 수 있어 사망, 건강 악화 등 환자 상태 변화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받기도 했다.

각급 병원들이 환자를 떠넘기는 와중 환자와 보호자들은 불안을 호소했다. 폐암·유방암 치료를 위해 부산에서 서울로 원정 수술을 하러 온 A씨는 지난 19일 세브란스병원으로부터 수술 취소 통보를 받았다. A씨는 “부산에 2차 병원들이 있긴 하지만 지역보단 병원 시스템, 장비가 좋은 서울 대형병원에 더 믿음이 가는 건 사실”이라며 “부산에 왔다 갔다 하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데도 불구하고 서울을 찾아왔는데 파업 이후 기약 없는 기다림만 하고 있다. 그사이 병이 더 나빠질까 봐 무섭고 불안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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