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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곳 전화 돌려 겨우 군병원서 수술…“아버지 받아줘 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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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0일 서울아산병원 응급실 앞에 ‘진료 불가’를 안내하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박종서 기자

20일 서울아산병원 응급실 앞에 ‘진료 불가’를 안내하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박종서 기자

“아버지가 이대로 돌아가시는 건가 너무 막막하고 암담했는데….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20일 낮 12시 경기도 분당의 국군수도병원 응급의료센터. 고관절 골절 환자 임모(83)씨가 들것에 실려 들어왔다. 응급의료센터에서 대기 중이던 문기호(41) 중령이 임씨의 상태를 살폈다. 문 중령은 2022년 10월 전방 부대에서 지뢰 운반 사고로 발목을 절단할 뻔한 표정호 병장 수술의 집도의였다. 임씨의 보호자인 부인 서재희(78)씨와 딸(50)은 수도병원 의료진에게 연신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네며 울먹였다.

‘모든 차량 진입 가능’. 이날 찾은 수도병원의 입구에 켜져 있던 사인이다. 의대 정원 증원에 반발해 대형 병원 전공의들이 집단휴업에 들어가자 군은 수도병원을 비롯한 12개 군병원을 민간에 개방했다. 의무사 예하 수도·대전·양주병원, 해군·공군 의료시설 등이다. 국방부는 민간인의 응급실 내원 편의를 위해 이날부터 보안서약서 절차를 간소화하고, 병원 출입 행정 절차를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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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두암과 뇌경색 등을 앓는 임씨는 남양주 덕소 자택에서 발생한 낙상 사고로 지난 15일 구리시의 Y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병세가 나빠졌고, 19일 Y병원에서 “고령에 지병을 앓고 있으니 대학병원에서 수술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임씨의 딸은 이날 밤 10시부터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에 전화를 돌렸다고 한다.

외래 환자에 “예약 바꾸라” 문자

20일 서울성모병원 정형외과에서 환자들에게 예약 변경을 요구하며 보낸 문자. 김서원 기자

20일 서울성모병원 정형외과에서 환자들에게 예약 변경을 요구하며 보낸 문자. 김서원 기자

그는 “서울대병원, 분당서울대병원, 한양대병원, 경희대병원 등 5곳에 전화를 돌렸는데 ‘오늘부터 전공의 파업이라 응급실에 와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임씨의 가족은 실낱같은 희망으로 국군수도병원 응급실에 전화했다. 응급수술이 가능하다는 답을 듣고, 사설구급차를 불러 50여 분을 달려 수도병원으로 왔다. 딸 임씨는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돼 너무 안도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옆에서 눈물을 훔치던 임씨의 부인 서씨는 “의사들이 파업을 해도 대체 인력을 준비해 놓고 하든지, 생명을 가지고 장난하나”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전공의들의 사직서 제출이 잇따르면서 대형병원 의료 공백이 현실화됐다. 서울대·신촌세브란스 등 이른바 ‘빅5’ 병원은 조기 퇴원자가 속출하고 파업 소식을 들은 시민들의 발걸음이 줄어 평소보다 썰렁한 모습이었다.

20일 오전 서울대병원, 60대 여성 A씨가 짐을 들고 나오며 울분을 토했다. A씨의 남편은 지난 11일 밤 심부전 증상이 나빠져 급히 응급실로 실려 왔다가 입원 중이었는데, 전날 의사가 조기 퇴원을 권했기 때문이다. 남편의 상태가 걱정된 A씨는 계속 퇴원을 거절했지만, 병원은 급기야 “오늘 오전 6시 이후로 안 나가면 환자만 방치되고 응급 상황이 발생해도 책임을 못 진다”며 퇴원을 종용했다고 한다.

일부 병원, 간호사가 업무 떠맡아

20일 대전 한 종합병원에서 강제퇴원을 통보받은 환자가 병원을 나서고 있다. [뉴스1]

20일 대전 한 종합병원에서 강제퇴원을 통보받은 환자가 병원을 나서고 있다. [뉴스1]

지난 19일 오전 11시 신촌세브란스병원이 응급실 접수를 중단한 데 이어 20일엔 서울아산병원에서 ‘응급실 병상 포화 상태로 진료 불가’라고 쓰인 입간판이 등장했다. 전날 오후까진 없었던 것이었다.

일부 과는 외래진료도 거부했다. 세브란스 안과는 이날 오전 환자들에게 “수도권 상급종합병원 전공의 사직으로 일반 진료 진행이 어렵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병원 관계자는 “원래 전공의가 안압, 시력 검사 등 예진을 담당했는데 전공의 파업으로 교수도 기초 데이터를 볼 수 없어 진료를 볼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성모병원 정형외과도 이날 “과내 사정으로 원활한 진료가 어렵다. 급한 진료가 아니면 4월 이후로 예약 변경을 부탁한다”고 안내 문자를 보냈다.

지방 대형병원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양산부산대병원과 본원인 부산대병원에선 지난 19일 전공의 407명 가운데 350명(86%)이 사직서를 던졌다. 배용찬 부산대병원 성형외과 교수는 “이번 주 목요일 오랜만에 당직을 선다. 고참 대접 받을 상황이 아니다”고 했다. 주로 피부암 환자의 피부 재건 등 수술을 맡고 있는 배 교수는 “환자에게 직접 전화해 수술 일정을 조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병원의 신용범 재활의학과 교수는 “연구실에 라꾸라꾸 침대를 들였다. 병원에서 숙식하며 (전공의 공백에) 대응해야 한다. 다른 교수들도 비슷한 실정”이라고 했다.

병원들은 일단 중환자실을 중심으로 전력을 쏟아붓고 있다. 서울성모병원 관계자는 “교수와 펠로(전임의) 등 남은 인력을 최대한 활용해 중환자실, 수술실, 분만실은 비상체제로 운영 중”이라고 말했다. 세브란스병원은 “병동 축소 운영으로 퇴원·전원 권유를 시작했지만 교수들 판단하에 괜찮은 인원만 퇴원 조치하고 중증환자는 우선 케어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전공의 업무를 떠맡게 된 간호사들의 불만과 걱정도 터져나왔다. 서울아산병원에선 간호사 결원 대체 인력인 ‘에이플러스팀’이 전공의 대신 출근 및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아 논란이 됐다. 대한간호협회 관계자는 “정부가 PA(진료보조 또는 임상전담) 간호사 투입 방안을 고민하고 있지만, 간호법 제정도 안 된 상태에서 법적 책임을 떠안을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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