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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그린 우화적 애니메이션…베를린 영화제 네번째 초청된 정유미 감독

중앙일보

입력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서클'. 사진 매치컷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서클'. 사진 매치컷

한 소녀가 땅에 원을 그린다. 원 안에 하나둘 씩 모여든 사람들은 원이 지워지자 뿔뿔이 흩어진다.
지난 15일(현지시간) 개막한 제75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초청된 정유미 감독의 ‘서클’이다. 정교한 연필 세밀화로 대사 없이 다양한 인물 군상을 그렸다. 여백의 미를 살린 7분 분량의 힘 있는 묘사가 풍부한 해석을 불러일으킨다.
‘먼지아이’(2009)로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진출하며 주목받은 정 감독은 베를린 영화제에 네 번째 초청됐다. ‘수학시험’(2010), ‘연애놀이’(2013), ‘존재의 집’(2022)에 이어서다. 국립현대미술관 기획전시를 위해 제작한 ‘파도’(2021)로 지난해 스위스 로카르노 국제영화제 단편경쟁부문에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초청된 지 1년 만의 겹경사다. ‘연애놀이’는 제24회 자그레브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한국 최초 대상을 받기도 했다.

정유미 감독이 단편 애니메이션 '서클'로 올해 베를린 단편 경쟁부문에 4번째 초청됐다. 사진은 정 감독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이다. 사진 매치컷

정유미 감독이 단편 애니메이션 '서클'로 올해 베를린 단편 경쟁부문에 4번째 초청됐다. 사진은 정 감독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이다. 사진 매치컷

부산에서 활동 중인 정 감독은 베를린 출국 전 본지와 전화 인터뷰에서 “간결한 구조로 가볍게 만든 작품이어서 경쟁부문 진출이 의외였지만,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베를린영화제 4번째 경쟁 진출 #단편 애니 ‘서클’ 정유미 감독

"장난처럼 그린 원, 고정관념 틀 될 수 있어"

‘서클’은 보는 시선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 단편부문 책임자인 안나 헨켈-도너스마르크는 ‘서클’에 대해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이 원 안에 서로 자기 자리를 잡아 간다”며 “의심과 불통의 시대에 예술이 대안을 보여준 예시”로 꼽았다.
“집단 무의식에 깊이 자리 잡은 고정관념의 틀을 그리려 했다”는 정 감독은 “아이가 장난처럼 그린 의미 없는 틀 안에 사람들이 몰릴 수 있다. 벗어나면 불안해지는 심리가 작동한다”면서 “정해진 틀이 보이면 들어가 머물게 되지만, 틀이 없어지면 원래 가고 싶었던 곳으로 자유롭게 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정유미 감독 단편 애니메이션 '존재의 집'. 사진 매치컷

정유미 감독 단편 애니메이션 '존재의 집'. 사진 매치컷

정 감독은 경험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는다. 집‧해변 등 친숙한 공간에 우화적 상상을 불어넣는다. 반복 구조로 이야기를 확장하며 내면의 자아, 삶의 여러 주제를 펼쳐낸다. 번듯한 양옥집이 한 꺼풀 씩 사라지고 발가벗은 사람이 유유히 걸어 나오는 ‘존재의 집’이 대표적이다. ‘연애놀이’는 한 커플의 희로애락을 과자 따먹기‧병원놀이‧시체놀이 등 유년시절 놀이로 표현했다. ‘파도’는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파도에 여러 인물‧동물들의 생사의 변곡점을 새겼다. 집 청소 중 말끔히 치워지지 않는 먼지를 외면하고픈 자신의 못난 모습으로 의인화한 ‘먼지아이’는 박찬욱 감독이 극찬하며 자신의 영화 ‘박쥐’ DVD에 수록하기도 했다.

박찬욱이 '박쥐' DVD에 수록까지 하며 극찬 

정유미 감독 '먼지아이'. 사진 매치컷

정유미 감독 '먼지아이'. 사진 매치컷

정 감독은 “‘먼지아이’는 예전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고, 잘 못하는 내 모습이 싫어서 저항했다면, 욕먹고 누가 미워해도 나만 괜찮으면 좋지 않은가 라는 식으로 생각이 바뀌면서 만들었다”며 “‘존재의 집’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집이 무너지면 불안하지만, 물질화된 공간이 사라지면서 자유가 시작되는 느낌이 ‘서클’과도 닮았다”고 말했다.
그의 첫 애니메이션은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졸업작품 ‘나의 작은 인형 상자’(2006)다. 연필화는 “틀려도 수정하고 지울 수 있어 마음 편히 표현할 수 있어서” 어릴 적부터 즐겨 그렸다. 그는 “대학(국민대)에서 미술 전공할 땐 채색도 했지만 KAFA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면서 연필로 돌아왔다. 배경이나 소품을 흑백으로 섬세하게 묘사했을 때 국적‧시대가 모호한 지점이 생기고 초현실적인 느낌이 매력적”이라면서 “흑백이 주는 불편감이 좋다. 건조하고 공포스러운 느낌이 집중도를 높여준다”고 했다.
‘먼지아이’ 때만 해도 단편 한편 당 5000장 가까이 장면을 그렸지만, 지금은 초반 캐릭터만 연필로 잡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디지털 캐릭터를 만들어 작업 시간을 줄였다. ‘서클’은 5개월 정도 걸렸다.

정유미 감독 단편 애니메이션 '나의 작은 인형상자'. 사진 매치컷

정유미 감독 단편 애니메이션 '나의 작은 인형상자'. 사진 매치컷

정 감독은 ‘먼지아이’와 ‘나의 작은 인형 상자’를 그림책으로 출간,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서 2014‧2015년 각각 라가치상을 받기도 했다. ‘연애놀이’도 2017년 양장본 및 페이퍼백 그림책이 나왔다. 이듬해 서울에서 동명 개인전도 열었다.
그는 “이윤이 남기보다는 즐거워서 하는 작업”이라며 “단편 애니메이션은 지원이 없으면 만들기 쉽지 않아, 다른 사업을 병행하며 작업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유미 감독 단편 애니메이션 '연애놀이'. 사진 매치컷

정유미 감독 단편 애니메이션 '연애놀이'. 사진 매치컷

한편, 올해 베를린 영화제 한국 초청작은 ‘서클’을 비롯해 5편이다. 홍상수 감독이 프랑스 배우 이사벨 위페르와 다시 뭉친 31번째 장편 ‘여행자의 필요’가 장편 경쟁부문, 허명행 감독·마동석 주연의 액션영화 ‘범죄도시4’가 스페셜 갈라에 초청됐다. 장재현 감독의 공포물 ‘파묘’는 포럼 부문, 김혜영 감독의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는 청소년 영화부문인 제너레이션 K플러스에서 상영된다. 베를린 영화제는  25일 폐막한다.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서클'. 사진 매치컷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서클'. 사진 매치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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