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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세 넘으면 안락사 지원…초고령 사회 섬뜩한 상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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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78세 미치(바이쇼 치에코)는 ‘플랜 75’를 신청한다. 75세 이상 고령자가 ‘죽음’을 신청하면 정부가 ‘시행’해 주는 제도다. [사진 찬란]

78세 미치(바이쇼 치에코)는 ‘플랜 75’를 신청한다. 75세 이상 고령자가 ‘죽음’을 신청하면 정부가 ‘시행’해 주는 제도다. [사진 찬란]

“넘쳐 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 노인들도 더는 사회에 폐 끼치기 싫을 것이다.”

지난 7일 개봉한 일본 영화 ‘플랜 75’의 첫 장면, 노인들을 무차별 살해한 젊은 남성이 자살을 하며 이같은 유언을 남긴다. 이런 노인 혐오 범죄에 응답하듯 일본 국회는 ‘75세 이상 고령자가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지원’하는 안락사 제도 ‘플랜(Plan) 75’를 통과시킨다.

제75회 칸 국제영화제(2022) 황금카메라특별언급상(신인감독상) 수상작인 ‘플랜 75’가 그린 충격적인 미래상이다. 남편과 사별하고 가족 없이 사는 78세 미치(바이쇼 치에코)는 호텔 청소 일을 강제로 그만두게 되면서 플랜 75 가입을 고민한다. 미치의 사연을 중심으로, 플랜 75팀의 젊은 공무원 히로무(이소무라 하야토), 안락사 시설에서 일하는 필리핀 이주노동자 마리아(스테파니 아리안) 등을 통해 노인 안락사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담았다.

안락사 상담 중인 콜센터 직원(위 사진)과 공무원,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 노동자까지 영화 ‘플랜 75’는 초고령 사회의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사진 찬란]

안락사 상담 중인 콜센터 직원(위 사진)과 공무원,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 노동자까지 영화 ‘플랜 75’는 초고령 사회의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사진 찬란]

초고령 사회(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 이상) 일본의 공포가 영화 속에 짙게 배있다. 고령화·인구감소 쇼크를 겪고 있는 한국 사회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최근 내한한 하야카와 치에(48) 감독은 “고령자도 행복할 권리가 있고 정부는 ‘모두의 인권’을 보호할 의무가 있지만, 영화에선 정부가 오히려 ‘모두의 인권’을 핑계로 고령 약자층을 배제한다. 일본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위기 의식을 느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안락사 상담 중인 콜센터 직원과 공무원(위 사진),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 노동자까지 영화 ‘플랜 75’는 초고령 사회의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사진 찬란]

안락사 상담 중인 콜센터 직원과 공무원(위 사진),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 노동자까지 영화 ‘플랜 75’는 초고령 사회의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사진 찬란]

일본에서 초고령화는 심각한 사회 문제다. 2025년엔 국민 20% 가량이 75세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인구 전문가 가와이 마사시는 2017년 저서 『미래 연표』에서 일본 고령자 수가 정점을 맞는 2040년대엔 간병 시설이 부족해 입소 쟁탈전이 벌어지고, 고령의 부랑자가 넘쳐 난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내놓기도 했다.

안락사 상담 중인 콜센터 직원과 공무원,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 노동자(위 사진)까지 영화 ‘플랜 75’는 초고령 사회의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사진 찬란]

안락사 상담 중인 콜센터 직원과 공무원, 유품을 처리하는 이주 노동자(위 사진)까지 영화 ‘플랜 75’는 초고령 사회의 디스토피아를 그렸다. [사진 찬란]

치에 감독은 2017년 ‘플랜 75’를 단편영화로 먼저 만들었다. 2016년 일본 가나가와 현의 장애인 시설에서 무차별 흉기 난동으로 19명을 살해한 범인이 “사회에 도움 되지 않는 장애인은 살처분해야 한다”고 말한 데서 영화를 착안했다.

극 중 정부는 플랜 75 신청자에게 10만엔씩 준비금까지 지급하며 건강진단이나 의사·가족의 승인, 심지어 주민등록도 필요 없다고 홍보한다. 치에 감독은 “고령자를 위한 복지 예산 부담을 줄이려는 의도란 걸 보여주려 했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30일 내한한 하야카와 치에 감독을 서울 마포구 북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찬란]

지난달 30일 내한한 하야카와 치에 감독을 서울 마포구 북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찬란]

영화 속 안락사 신청 연령을 75세 이상으로 정한 건, 일본 현행 정책에서 착안했다. 치에 감독은 “약 20년 전부터 일본 정부가 75세 이상을 ‘후기 고령자’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75세에 선을 그으면서 ‘당신의 인생은 여기서 끝입니다’라고 말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국가가 이런 (안락사) 시스템을 만든다면 75세로 선 긋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영화의 비관적 미래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건 주인공 미치의 존재다. 그는 실직 후 단짝 친구의 고독사 현장까지 발견하지만, 자신과 주변 이웃·친구들을 살뜰히 챙기며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오르막길에서 가쁘게 몰아쉬는 그의 숨소리는 영화 초반엔 노화의 비애로 느껴지지만, 결말에선 살아있음의 증명처럼 다가온다.

치에 감독은 “안락사의 옳고 그름을 논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삶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일본에서도 안락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그는 “나이 듦에 대한 불안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안을 없애기 위해 다 같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방향이 아니라, 힘드니까 죽어야지 라는 생각이 우선시 되는 건 이상하지 않냐”고 반문했다.

그는 “2년 전 일본 개봉 당시 영화를 보기 전엔 ‘플랜 75’ 같은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는 반응도 많았는데 막상 보고 나선 마음이 변했다거나, 국가가 국민의 생사를 제어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는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고 전했다. 이어 “해결책까지 될 수는 없겠지만, 영화·예술을 통해 상상력과 감수성을 되찾으며 보다 나은 사회로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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