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삼성·LG·효성 창업주 나왔다…'재벌 셋' 예언한 명당 어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의령 정암마을의 전설

국내여행 일타강사

경남 의령 남강에는 솥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습니다. 누군가 이 바위 20리 안에서 국부(國富) 세 명이 난다고 예언했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전설은 현실이 됐습니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 LG 창업주 구인회 회장, 효성 창업주 조홍제 회장이 솥바위 반경 20리 언저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의령 남강의 솥바위.

의령 남강의 솥바위.

의령의 관문에는 지리산의 정기를 품은 남강이 역사의 숨결이 되어 흐르고 있다. 남강 물속에 솥을 닮은 바위를 솥바위라 칭하고 마을을 정암이라 했다. 이 곳 나루터가 정암진이다. 조선 후기 어느 도인이 솥바위를 보고 예언을 남겼다는 전설이 있다. “이 바위를 기준으로 반경 20리(8㎞) 안에서 나라를 일으키는 큰 부자 세 명이 나올 것이니라.”

도인의 신원은 알려진 바 없고 이 전설에 관한 기록도 없다. 허구는 아닐까? 의령군청 강선아 관광진흥팀장이 펄쩍 뛰었다. “정암이란 지명은 조선 전기 기록에도 나온다. 부귀를 누린다는 대목은 없어도 정암의 기운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서 전해진다.”

호암 생가 정문에서 사랑채를 바라보고 촬영한 모습. 뒤쪽에 안채가 보인다.

호암 생가 정문에서 사랑채를 바라보고 촬영한 모습. 뒤쪽에 안채가 보인다.

솥은 예로부터 부귀와 영화의 상징이었다. 솥 정(鼎) 자를 쓴 정식(鼎食)은 진수성찬을 뜻한다. 조선 시대 삼정승의 다른 표현이 정보(鼎輔)였고, 과거 시험 최우등 급제자 세 사람을 정갑(鼎甲)이라 불렀다. 솥바위 다리가 셋이라는 것도 사실일까. 강명희 의령군 문화관광해설사는 “모래가 많이 쌓여 바위 밑을 확인할 수 없지만, 바위 밑 구멍에 이무기가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 왔다”고 말했다.

솥바위 전설은 그대로 현실이 됐다. 네이버 지도상 삼성 이병철 생가는 솥바위로부터 7.9㎞, 효성 조홍제 생가는 8.2㎞, LG 구인회 생가는 9.2㎞ 떨어져 있다. 20리 언저리다.

해 뜬 직후, 강물에 뜬 솥바위에는 신성한 기운마저 감돈다. 가장 솥뚜껑 같은 모습은 솥바위 오른쪽 정암철교 중간까지 나아가 내려다 봐야 보인다. 솥바위 옆에는 백마 탄 홍의장군 곽재우의 동상이 있다. 임진왜란 때 곽 장군이 의병을 일으킨 곳이 솥바위 나루터다.

호암 생가 마을 부자광장 바닥에 새겨진 호암의 문장.

호암 생가 마을 부자광장 바닥에 새겨진 호암의 문장.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1910~87)의 생가는 솥바위 동쪽이다.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中橋里). 의령 사람들은 마을 전체가 담 안쪽에 있어 담안마을이라고 했는데, 그 한자 표기가 장내(墻內)마을이다. 호암의 조부가 1851년 지은 호암 생가는 2007년 11월 개방됐다. 안채의 오른쪽 방에서 호암이 태어났다.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은 주변 산의 기(氣)가 산자락의 끝에 위치한 생가터에 혈(穴)이 되어 맺혀 있어 그 지세가 융성할 뿐만 아니라, 멀리 흐르는 남강의 물이 빨리 흘러가지 않고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逆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재물이 쌓일 수밖에 없는 명당 중 명당.”

호암재단이 안내판에 쓴 내용이다. 생가에 들어서면 야트막하고 완만한 산이 생가를 빙 두른 형세가 느껴진다. 안채 오른편에 벽처럼 선 바위도 심상치 않다.

경주 이씨 집안이 장내마을에 정착한 건 조선 중기 연산군 때였다. 호암의 조부 이홍석(1838~97)이 집안을 일으켜 천석꾼이 됐다. 호암은 선친 이찬우(1874~1957)의 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호암은 다섯 살부터 이홍석이 마을에서 1.5㎞ 떨어진 산자락에 지은 서당 문산정(文山亭)에 다녔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나는 어릴 때 출중하다는 말을 별로 듣지 못하였다. 다만 유별나게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한문 공부는 『천자문』부터 시작했는데, 흔히 두서너 달이면 뗀다는 『천자문』에 나는 1년 남짓 걸렸다. 그래도 5년 가까운 서당 공부에 보람이 있어 『통감』이나 『논어』도 통독할 수 있었다.” (『호암자전』)

호암은 『논어』에서 ‘언필신 행필과(言必信 行必果)’를 자주 인용했다. 말에는 반드시 신용이 있어야 하고 행동은 반드시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뜻. 신의를 중시하는 삼성의 경영이념과 통한다. 마을 한쪽 부자광장의 한 바닥돌에는 ‘여행은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된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쫓겨서 자기를 잃기 쉽다’는 호암의 말이 새겨져 있다.

20대 청년 호암은 건강 때문에 일본 유학을 1년 만에 접었고 4년 넘는 방황 끝에 시작한 정미소, 운수업 등을 줄줄이 말아먹었다. 시쳇말로 ‘영혼까지 털린’ 그의 다음 행동은 뜻밖에도 여행이었다. 1937년 약 6개월간 서울·평양·대구 등을 돌며 심신을 추스르고 이듬해 3월 설립한 게 삼성상회다.

호암은 열두 살이 되던 1922년 3월 진주의 지수보통학교에 들어간다. LG 창업자 구인회와 같은 학년이 된다. 호암의 진주 유학생활은 ‘부자 되는 여행’ 2편에서 다룬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