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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님도 못 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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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김현예 도쿄 특파원

일본 도쿄 긴자 한구석에 신경 쓰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칠 법한 자리에 가게 하나가 있다. 올해로 4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곳으로 주인도 일본인, 직원들도 모두 일본인인 이 가게에선 ‘고려병(餠)’이란 이름의 떡을 판다. 녹차와 곁들여 먹는데, 시루떡 형태로 묘한 그리움마저 불러일으킨다. 호기심이 동해 이리저리 검색하다 가고시마현 과자공업조합이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가고시마의 유명 과자 소개를 발견했다. 가고시마의 고려병에 대한 것으로 고려병 옆에 ‘고레모치’란 음을 달았다. ‘에도시대에 한국 고려에서 끌려온 도공들이 고향을 그리며 신사를 세우고 제를 지낼 때 찹쌀과 팥앙금으로 쪄낸 과자. 맛이 좋아 서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지난 9일 주일 한국 문화원에서 한국떡 연구가 노하라 유미씨가 최근 출간한 『쌀가루로 만드는 한국 떡 간식 』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지난 9일 주일 한국 문화원에서 한국떡 연구가 노하라 유미씨가 최근 출간한 『쌀가루로 만드는 한국 떡 간식 』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김현예 특파원

서설이 길었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이 고려 떡을 떠올리게 된 건 순전히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다. 최근 한국 떡에 대한 책을 출간하게 된 노하라 유미(野原由美·46)다. 달콤한 팥앙금이 많이 든 일본 떡을 파는 가게엔 늘 손님이 북적이는데, 그런 일본에서 한국 떡 책을 낸다고? 일본과 오랜 인연이 있지만 그간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던 한국 떡이 책으로도 나온다니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설 연휴가 시작되던 지난 9일 주일 한국문화원에서 그를 만났다. 자리에 앉자 가방에서 통을 하나 꺼낸다. 갓 쪄온 시루떡이 고운 자태로 담겨있다. “제가 한국 떡을 만들기 시작한 지 13년 됐으니까 이 떡은 사람으로 치면 중학생의 맛이겠죠? 고등학생의 맛, 어른의 맛으로 올려 나갈 거예요.”

바리스타로 일하던 지난 2009년 도쿄에서 우연히 ‘하얀 증기가 올라오는 찜기가 있는 가게’에 들어간 것이 인연의 시작. 이곳에서 호박설기를 처음 맛본 뒤 지금껏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소박한 맛에 반해 그길로 감자떡에 바람떡까지 한국 떡에 빠졌다. 틈이 나면 한국을 찾아 지방을 돌며 특유의 떡을 맛보는 떡 여행도 시작했다. 떡이 좋아 한글을 배웠고, 그 덕에 한국에 대한 애정마저 깊어졌다. 이젠 학생들에게 한국 떡을 가르치는 전도사 역할도 자처하고 있다. “한국 떡은 행복을 상징하는 것 같아요. 서로 나눠 먹는 행복이요. 한국인들은 이사나 결혼식, 생일에도 떡을 먹잖아요? 두 나라의 과거는 바뀌지 않겠지만, 서로 떡을 나눠 먹으며 사이 좋게(友好) 지내면 좋겠어요.”

한 나라의 무언가를 선입견 없이 좋아하게 되는 것에서 시작해 그 나라를 알게 되고, 더 나아가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 드라마나 노래 뿐만이 아닌, 일본에서 마주치는 ‘한국 문화’로 통칭되는 소소한 우리의 것들은 나라님도 그 어떤 정치인이나 권력집단도 못해낸 위대한 일들을 지금도 이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