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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이 인간 속성이라면…“함께 지낼 방법” 찾아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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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6호 20면

중독의 역사

중독의 역사

중독의 역사
칼 에릭 피셔 지음
조행복 옮김
열린책들

쇼핑 중독, 인터넷 중독, 게임 중독… 중독은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현대인의 여러 문제를 설명하는데 널리 쓰이는 말이다. 일반적인 음식이나 새로운 TV 드라마에 빠져든 모습도 ‘중독됐다’고 표현한다. 약물을 비롯해 중독의 심각한 폐해를 걱정하거나 연구해온 사람이라면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겠다.

이 책 『중독의 역사』를 보면, 중독이란 말이 복합적이고 모호하게 쓰이며 때로는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저자가 꼽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중독 관련 사례는 도박. 기원전 1000년 이전에 쓰인 인도의 고대 문헌 『리그베다』에는 ‘노름꾼의 애가’라는 시가 나온다. 중독의 역사에 비하면 이를 중독(addiction)이라 부르게 된 것도, 이를 질병으로 보거나 ‘물질 사용 장애’라는 이름으로 규정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목판화 ‘술꾼의 진행 단계: 첫 잔부터 무덤까지’(너새니얼 커리어, 1846년). 부인과 아이의 슬픈 모습도 담겼다. [사진 열린책들]

목판화 ‘술꾼의 진행 단계: 첫 잔부터 무덤까지’(너새니얼 커리어, 1846년). 부인과 아이의 슬픈 모습도 담겼다. [사진 열린책들]

저자는 미국의 중독 전문 의사이자 정신 의학과 교수로, 레지던트 시절 술과 약물 중독으로 병원과 재활프로그램 신세를 졌던 사람이다. 책 곳곳에 자신의 경험을 녹이면서 중독과 이를 바라보는 시각 등의 역사를 파고든다. 그중 제2장 ‘유행병’은 특정 물질의 공급과 사용이 급증하면서 벌어진 일들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17~18세기 영국에서 값싸고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진의 보급이 불러온 광풍이 그 예다. 이와 함께 이런 물질을 금지하는 움직임도 일찌감치 나타났다. 담배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전에는 유럽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식물이지만, 이내 유행이 됐고, 여러 나라에서 금지나 처벌 조치가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담배세는 주요한 재정 수입원 중 하나로, 담배는 합법적 물질로 자리 잡았다.

책에는 특정 물질의 확산과 중독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골고루 언급된다. 제약회사를 비롯한 공급자의 마케팅, 사용자를 둘러싼 사회적 상처 등과 함께 저자는 새로운 합성물질과의 ‘허니문’ 기간도 주목한다. 19세기 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친구의 모르핀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처방한 것은 놀랍게도 코카인이었다. 지금 보면 터무니없는 일이지만, 이후에도 새로운 합성물질이 등장하고 확산할 때마다 비슷한 양상이 반복됐다.

저자는 미국의 금주 운동이나 사법적 처벌의 도입 과정 등도 상세히 전한다. 이를 포함해 이 책이 전하는 역사는 책 초반에 저자가 제시한, 중독에 대한 네 가지 접근법과 대체로 맞물린다. 처벌을 비롯한 금지론적 접근법, 의학적 질환으로 보는 치료적 접근법, 과학적 설명과 생물학적 치유를 모색하는 환원론적 접근법, 지역 사회의 치유와 연대를 통해 회복을 추구하는 서로 돕기 접근법이다. 하지만 그중 어느 하나가 모든 문제에 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 중독을 뇌의 문제로 여기는 데 대해서도 저자는 도파민이나 엔도르핀에 대한 대중적 인식에서 과장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으로 처벌이 특정 인종·계급에 대한 편견과 결합해 ‘낙인찍기’가 된 양상, 각종 약물 처방을 우선시하는 풍토가 낳은 문제 등도 지적한다.

뜻밖의 연구 결과도 눈에 띈다.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에 대한 헤로인 중독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다. 귀국 이후 대부분 치료를 받지 않았는데도 1년 뒤 중독자 비율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작가 윌리엄 버로스의 유명한 말이기도 한 “한 번 정키(중독자)는 영원한 정키”라는 인식과 상반되는 결과이자, ‘자연적 회복’이라는 현상에 눈을 뜨게 한 결과다. 중독에 대한 행동 경제학의 설명도 눈길을 끈다. 사람들은 나중의 큰 보상보다 작아도 즉각적인 보상을 선호한다는 것인데, 역설적으로 코카인 중독 치료에 활용한 실험도 있다. 소변 검사에서 음성이 나오면 영화표 같은 작은 보상을 주었더니 효과가 뚜렷이 나타났다.

저자는 중독을 사회적 병폐나 뇌의 질환 등으로 단일하게 설명하는 대신 복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의 말미에는 이렇게 썼다. “중독은 몹시 평범하다. 삶의 즐거움과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방법이고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인간 운명의 한 가지 표현일 뿐이다. 중독이 인간의 속성이라면 그것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중독을 끝내지 못할 것이다. 중독과 함께 지낼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때로는 부드럽고 때로는 격렬하게. 그러나 전쟁을 치르듯이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본성에 맞서 싸우는 전쟁은 부질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는 책 머리의 다음 대목과도 통한다. “중독이 인간의 삶의 한 부분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중독을 뿌리 뽑겠다는 꿈을 포기하고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온갖 개입 조치를 편안하게 검토할 수 있다. 최우선의 목표는 승리나 치료가 아니라, 해악을 줄이고 사람들이 고통을 지닌 채 그리고 고통을 뛰어넘어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회복이다.” 읽어나갈수록 중독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걸 실감하게 하는 책이다. 원제 The Urge: Our History of Add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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