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단편 릴레이 편지] 태풍 매미 이후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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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식구들이 꼬부랑 할매네 밭에 고구마를 캐러 갔습니다. 태풍에 고구마 잎이 모두 날아가고 다시 돋아나는 바람에 고구마 대부분이 잘았습니다. 쟁기질을 마친 소가 고구마 잎으로 배를 불리고 있는 사이, 아이들은 새끼 염소처럼 까불며 고구마를 부대에 담았습니다. 반나절 일을 거들고 고구마 한 부대를 얻었지요.

집사람이 전날 다른 밭에서 일해 주고 받아온 고구마 한 부대까지 마당에 쏟아놓았습니다. 그 중에서 실하고 굵은 놈으로만 고른다고 골라 도시에 사는 친척들에게 보냈습니다. 며칠 후 고구마를 받았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집사람은 태풍 때문에 고구마 농사가 잘 안됐다며 미안해했습니다.

우리 몫으로 남은, 올망졸망한 고구마를 한 솥 삶아놓고 아이들과 둘러 앉았습니다. 고구마 생김새 탓하지 않고 쭉쭉 찢은 김치를 척 올려놓고 호호 불며 먹는 아이들. 시골 사는 맛을 벌써 알아버린 아이들과 고구마 같이 달고 구수한 시골 사람들과 함께 맛난 겨울을 맞고 있습니다.

<'저구마을 편지'의 시인 이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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