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당직실, 만취자 대기소 됐다…경찰청이 내린 '이 지침' 탓

중앙일보

입력

2023년 12월 25일 오후 서울 강서경찰서 형사당직실. 형사과 형사 3명가량이 야간 당직을 서며 수사 업무를 이어가고 있다. 이아미 기자

2023년 12월 25일 오후 서울 강서경찰서 형사당직실. 형사과 형사 3명가량이 야간 당직을 서며 수사 업무를 이어가고 있다. 이아미 기자

지난 27일 오후 10시쯤. 서울 한 경찰서 형사당직실. 한 청년 A씨가 지구대 직원 4명에게 붙들려 왔다. 지역 업소에서 만취 상태로 난동을 부리다 체포돼 온 것이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A씨는 상의를 벗으면서 사방으로 침을 뱉고 바닥에 구토까지 했다. 이를 지켜보던 당직실 형사 5명가량 중 한 명이 한숨을 쉬며 “이 사람 토했어요”라고 소리치자 A씨를 데려온 지구대 직원들이 “죄송합니다”라며 수습했다. 지구대 직원들은 다시 미안한 기색을 보이며 형사들의 컴퓨터를 빌려 A씨에 대한 1차 조사 서류를 2시간가량 동안 만들었다. 그 사이 형사들은 자신의 업무를 중단하고 멀찍이 떨어져 있거나 아예 당직실 밖으로 나갔다.

지난 8월 말부터 전국의 주요 경찰서 형사당직실이 밤마다 이 같은 혼란을 겪고 있다. 8월 29일 경찰청에서 새 업무지침인 ‘지역관서(지구대·파출소) 체포 피의자 관리체계 개선 방안’을 내리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이 지침 전에는 지구대·파출소에서 체포한 피의자의 경우 원칙적으로 지구대·파출소에서 1차 조사를 한 뒤 혐의에 따라 경찰서의 각 담당부서(형사·수사·여성청소년과 등)로 이송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이젠 지구대·파출소가 피의자를 체포하면 곧바로 경찰서 형사당직실에 데려가 1차 조사를 한 뒤 그 자리에서 형사에게 바로 넘기거나 다른 부서에 넘겨주는 게 원칙이 됐다. 형사당직실이 관할 지구대·파출소들과 한정된 업무공간을 공유하게 된 셈이다.

새 업무 지침을 내린 이유로 경찰청은 “지난 6월 광주 광산지구대에서 도박 혐의 피의자 23명 중 10명이 1차 조사를 받던 도중 집단 탈주하는 사건 등이 잇따르는데, 유사 사건을 방지할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2023년 2월 9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의 경찰청 청사. 뉴스1

2023년 2월 9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의 경찰청 청사. 뉴스1

“도떼기시장”…지구대·파출소 직원도 불만 “불편하고 미안해”

지구대·파출소가 체포한 피의자의 도주를 막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대신 “당직실 형사들의 업무를 마비시키는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성토가 들끓기 시작했다. 서울 지역 다른 경찰서 형사당직실 형사는 중앙일보에 “지구대·파출소가 데려온 피의자들이 여기서 소리 지르고 대변·소변도 본다”며 “한마디로 도떼기시장이라 제대로 업무를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피의자들끼리 치고받으며 싸우는 경우도 있다.

다른 형사는 “형사들이 야간에 출동을 안 하면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으로 경찰청이 착각하고 만든 지침”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야간 근무 때 형사들은 압수수색·체포·구속 영장을 만들거나 수사보고를 작성하거나 사건 기록을 보며 수사 계획을 세우는 등 바쁘다”며 “일할 시간을 완전히 빼앗아 간 탓에 사건 처리가 더 지연된다”고 덧붙였다. 이 밖에 “현장을 모르는 지휘부가 탁상행정을 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지구대·파출소 직원들의 불만도 나온다. 서울 한 지구대 경찰관은 “남의 집보다 내 집이 편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형사당직실에 갈 때마다 불편하고 형사들한테 미안해 죽겠다”고 하소연했다. 인천의 한 지구대 직원은 “형사당직실에 형사들은 5명 안팎 정도로 소수고 지구대·파출소에서 체포해가는 인원이 많은 날엔 피의자 관리가 될지 걱정된다”며 “이러다 도주 사건이 형사당직실에서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경찰청은 “형사당직실 공간을 형사당직실, 지구대·파출소 1차 조사실, 기타 수사부서(여성청소년·교통과 등) 당직실로 구분하는 통합 수사당직실을 전국 경찰서에 확대하면 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올해 말까지 전국 경찰서 259곳 가운데 168곳에 통합 수사당직실이 설치된다. 그러나 경찰 내부망에는 “통합 수사당직실이 사실상 형사당직실과 다름없이 운영되며 똑같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는 증언이 잇따른다.

이 같은 논란을 두고 경찰청 관계자는 “일선의 불만을 잘 알고 있다”면서도 “공간 확보 노력 등을 통해 부작용을 개선해가면서 새 제도를 정착시키겠다”고 밝혔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는 “공간이나 예산, 인력 확보 등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사전에 면밀한 시뮬레이션을 거친 후 새 제도를 도입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경찰서별로 치안수요 등 현황을 세심하게 파악해서 그에 따라 차별적으로 업무지침을 내리는 등 대안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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