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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대선 구도 확 바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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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노무현 대통령이 28일 국무회의장인 청와대 세종실에 들어섰다. 하루 전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임명동의안을 철회한 노 대통령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한마디 할까요"라고 했다. 그러곤 "부당한 횡포" "대통령의 굴복" "당적 포기" "임기" 등의 폭발성 발언을 쏟아냈다.

삽시간에 회의장은 고요해졌다. 기자들만 대통령의 발언을 숨가쁘게 적어 내려갔다. 대통령의 발언 후 청와대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윤태영 대변인은 발언의 속뜻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심경과 각오를 얘기한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대통령은 어떤 정치를 하려는 걸까. 열린우리당과 결별 결심을 한 것일까. 일단 노 대통령의 발언은 참모들과의 사전 검토를 거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실무진에서는 미리 정해진 수순이나 시나리오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와대 기류를 종합하면 노 대통령은 이미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기로 하고 시기 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한 핵심 인사는 "여야정 정치협상회의를 제안할 때 이미 노 대통령은 탈당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그동안 당정 분리 원칙을 내세워 여야 영수회담을 피해왔다. 그런 노 대통령이 '여야정'이라는 틀을 구상하고 한나라당과의 직접 대화를 제안한 것부터가 더 이상 열린우리당이라는 울타리에만 의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는 분석이다.

특히 노 대통령은 당적 포기를 언급하며 '상황론'을 전개했다.

"당적을 포기해야 되는 상황까지 몰리면"과 "그 길밖에 없는 경우"를 든 게 단적인 예다. '상황'만이 조건이라면 '탈당 조건'은 무르익은 셈이다.

노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불화는 쌓일 대로 쌓였다. 김근태 의장이 대통령의 만찬 초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한 게 27일이다. 열린우리당에서 "대통령이 도움이 안 된다"는 얘기가 일반화된 건 오래전이다. 이 정도면 '당적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충분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열린우리당도 대통령과의 결별을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당과 청와대 간 협조의 톱니바퀴는 이미 어긋나고 있다. 그래서 홀로 남은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국정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틀이 필요한 상황이다.

노 대통령은 "임기 동안 직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이런저런 타협과 굴복이 필요하면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결국 당적 이탈은 기정 사실화되는 분위기다. 이럴 경우 거국 중립내각, 한나라당과 최소한의 협조 체제 구축은 필연적인 수순이다. 이런 상황은 2007년 대선의 정치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 대통령은 이미 여야정 정치협상회의를 한나라당에 제안하며 "남은 임기 중 국정 운영 기조나 방식까지 협상을 통해 합의할 수 있다"고 말했었다.

노 대통령이 탈당→중립내각 구성 등의 수순을 밟는다면 차기 대선을 앞둔 정치 지형은 크게 변하게 된다. 열린우리당 내부에선 정계개편론이 분출하며 제3의 신당이 탄생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대선 주자들로선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게임을 해야 하는 환경을 맞이하는 셈이다. 정치권은 '시계(視界)제로' 상황을 앞두고 있다.

문제는 탈당 시기다. 국회 회기 중에 탈당한다면 사법 개혁안, 국방 개혁안 등 이른바 국가 개혁 법안을 처리해야 할 정기국회를 마비시킨 책임을 노 대통령이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기국회 폐회 뒤 노 대통령의 탈당이 예상된다.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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