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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행사 좌절 … 또 '임기 도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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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노무현 대통령이 비명을 질렀다.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관둘 수도 있다고. 청와대 참모들은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포기가 노 대통령에게 너무 아픈 상처를 줬다고 한다. 권력행사가 좌절된 아픔이다.

"인사권은 대통령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권력"(8월 6일, 당 지도부와의 오찬서)이라고 말했던 노 대통령이다. 한 참모는 "여든 야든 국회가 식물 대통령을 만들어 버렸다"고 침울해했다.

그렇다 해도 "임기를 다 마치지 않은 첫 번째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대통령의 육성은 국민에게 충격이다. 미리 알아챈 청와대 참모들이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만류했을 정도다. 따지고 보니 이전에 노 대통령이 자기 임기 문제를 언급한 게 최소한 다섯 번이었다.

<발언록 참조>

이번이 여섯 번째다.

그래서 진정성을 의심하는 시각도 있다. 다른 노림수가 있지 않으냐는 얘기도 나온다. 동정심을 일으키거나 위기감을 조성해 지지세력을 결집하려는 노림수라는 얘기다.

노 대통령은 왜 이런 말을 또 했을까. 자기 자리를 몽땅 내던진다는 컨셉트는 1988년부터 18년간 잡초처럼 비주류로 성장해온 노무현식 정치의 핵심이다. 때론 장점이었고, 때론 단점이었다.

지금 노 대통령은 고립돼 있다. 열린우리당은 더 이상 우군 역할을 안 하거나, 못 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요즘 사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토로하고 있다 한다.

열린우리당에 기댈 게 없어 고심 끝에 한나라당에 보냈던 '여.야.정 정치협상회의'라는 SOS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노 대통령이 고립에서 탈출할 수 있는 돌파구가 또 한번 막혔다.

28일 국무회의 발언은 이런 심리 상태에서 나왔다는 게 주변의 분석이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자수성가식 정치를 해와 규범적.당위적 사고를 하지 않는 노 대통령 특유의 발언"이라며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고민하는 정체성 혼란의 상황에 빠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여야 정치권이 극단으로 밀어붙이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노 대통령은 중요한 정치적 결단을 할 때는 주변의 조언보다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는 스타일이다.

'나 홀로 정치'라는 평을 들어왔다.

2005년의 대연정 발언이 그랬고, 현재의 정치협상회의 제안이 그랬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향해 대연정 발언을 할 때도 청와대 참모들이 모두 말렸지만 노 대통령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러자 당시 문재인 민정수석이 "저렇게 하고 싶어하는데 그냥 우리가 양보하자"고 다른 참모들을 달랬다는 일화도 있다.

이 때문에 '예측하기 어려운 정치'는 노 대통령의 또 다른 특징이 됐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화법에 익숙한 청와대 참모들은 이번 발언이 진짜 대통령의 하야로 연결될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발언 내용보다 발언의 심경에 무게가 실렸다는 얘기다.

한 참모는 "탈당은 할 수 있어도 임기 포기는 노 대통령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다"고 단언했다. 각종 민생법안의 처리를 묶어두고 있는 정치권과 국회에 대한 항변이 역설적으로 표현된 발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발언은 큰 파장을 낳고 있다. 야 3당은 한목소리로 "대통령의 '임기' 발언은 사실상 국민과 반대파를 향한 협박"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들은 노 대통령에게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거국 중립내각을 구성하라고 요구했다.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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