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우이웃과 함께하는 세모(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마지막 한 장 남은 달력이 이 해를 마무리해 가고 있다. 전형적인 우리의 겨울 날씨답게 하늘은 잿빛으로 찌푸려 있고 도심을 오가는 인파 속에는 새해 캘린더를 말아 쥐고 웅크린 어깨로 종종걸음을 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연하장이 배달되기 시작하고,홍수를 이룬 차량들의 소음 속에서도 번화가 상점에서 간혹 흘러나오는 캐럴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어느덧 세모에 와 있는 것이다.
범죄와의 전쟁이다,유흥업소의 심야영업 단속이다 해서 연말의 흥청거리는 분위기가 예년에 비해 다소는 가라앉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일부 대형 음식점이나 은밀한 요정 같은 데서는 여전히 망년회 예약이 밀리고 벌써부터 고성방가의 향연이 무르익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인 것 같다.
반면에 차가운 거리에 놓여 있는 구세군이 자선냄비는 기온 만큼이나 썰렁하게 비어 있고,양로원이나 고아원,장애자보호시설 같은 사회복지시설을 찾는 사람의 발길 또한 예년에 비하면 매우 한산하다고 한다.
해마다 연말연시면 「불우이웃을 돕자」는 구호가 요란하지만 해가 갈수록 온정의 손길은 줄어 들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하소연이다. 이들 복지시설을 찾는 사람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각 구청과 동사무소에 마련된 불우이웃돕기 성금 접수창구의 접수실적도 극히 부진한 실정이라는 것이다.
지하도 계단에 웅크리고 업드려 있는 걸인 앞에도 동전 몇닙이 쓸쓸히 담겨 있을 뿐이다.
우리의 1인당 국민소득이 올해는 6천달러를 육박할 것이라고 전망되고 있고 상점에는 온갖 물건이 넘치도록 쌓여 있으며 쌀이 남아 돌아 보관이 곤란할 정도라는 배부른 고민도 국가적인 문제까지 돼 있다.
이른바 「선진국 대열의 문턱에 와 있다」는 자랑을 서슴없이 대외적으로 떠들어댈 정도다. 이러한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가난에 찌들고 추위에 떨고 있는 이웃이 아직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온정이 그 풍요의 향유로 인해 오히려 마비되고 소멸돼 가는 증좌에 다름아닌 것이다.
내가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남도 다 그러려니 하는 생각에 함몰돼 있음은 나의 안락만은 침해당하고 싶지 않다는 배타적 이기주의일 뿐이다. 혹은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이 돕겠지 하는 태도 또한 안이한 책임회피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는 오갈 데 없는 걸인들과 움막에서 간신히 비바람이나 피하고 있는 수재민들,의지할 데 없어 공공시설에 수용돼 있는 노인들,장애자들,고아들이 수없이 많다.
이들이 비록 국가기관에 의해 최소한의 보살핌은 받고 있을지라도 그들에게 굶주려 있는 따뜻한 온정의 손길을 보내는 것은 그들을 덜 외롭게 하는 일이며,동시에 우리들 심성에서 꺼져 가는 공동체적 사랑의 불꽃을 되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