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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안가길 잘했네" 울산서 일사천리 암치료…'원팀' 덕이었다 [지역의료, 희망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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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암 환자가 전남 화순전남대병원의 치유의 숲을 거닐고 있다. 사진 화순 전남대병원

암 환자가 전남 화순전남대병원의 치유의 숲을 거닐고 있다. 사진 화순 전남대병원

강원도 삼척시에 사는 80대 여성 A씨는 척추에 원인 모를 염증이 생겨 10월 초까지 삼척의료원에서 입원 진료를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척추 골수염이 악화했고 강릉아산병원으로 후송됐다. 지난달 11일 입원해 31일까지 고단위 항생제 치료를 받았다. 병세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지난달 31일 삼척의료원으로 돌아가 입원 치료를 계속 받고 있다. 삼척의료원은 강릉아산병원의 95개 협력병원 중의 하나이다. 두 병원은 A씨의 진료 정보를 공유해 검사를 줄이고, 병세를 빨리 정확하게 파악한다. 아산은 중증 치료, 삼척의료원은 후속 치료로 역할을 분담하며 그 지역에서 진료를 종결한다.

40대 직장인 조모씨는 8월 초 울산의 중소병원에서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주변에선 "서울 큰 병원로 가라"고 했다. 조씨는 주변의 암 환자가 서울 오가며 엄청 고생하는 것을 본 터라 길게 고민하지 않고 울산대병원을 택했다. 조씨는 "유방암 정도는 이제 표준적인 기법으로 치료한다고 알고 있어 서울행을 고민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암을 진단한 중소병원이 나서니 일사천리였다. 울산대병원에서 일주일만에 검사하고 항암 치료를 시작해 3차 치료를 마쳤다. 암 세포 크기를 줄여서 수술할 예정이다. 울산에서 치료받는 덕분에 회사를 계속 다니고, 고교생 자녀를 챙기고 있다. 조씨는 "서울에 안 가길 잘 했다"고 말한다.

지역에서 환자가 치료를 끝내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 일본·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낯설다. 다만 일부 지역에서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지역 병의원이 '원 팀'을 이뤄 환자 진료에 나선다. 큰 병원이 의료 기술을 전수하고 진료 정보 전산망을 깔아준다. 작은 병원은 환자를 큰 데로 보내고 다시 받아서 후속진료를 담당한다. 환자도 지역의료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정부가 지난달 중순 국립대병원 중심의 지역완결형 의료 대책을 뒤늦게 내놨지만 일부 지역에서 생존을 위해 자생적으로 지역완결 의료를 향해 치고 나가고 있다.

강릉아산병원 전경. 사진 강릉아산병원

강릉아산병원 전경. 사진 강릉아산병원

영동지방의 유일한 상급종합병원인 강릉아산병원, 울산광역시의 울산대병원 등이 그들이다. 강릉아산병원은 영동지역 작은 병·의원에서 매달 1000여명 환자 진료 의뢰를 받고, 급성 진료가 끝나면 1200여명을 작은 데로 보낸다. 환자가 동의하면 작은 병의원이 아산병원의 진료과·주치의·검사결과·투약내역 등을 확인해 진료에 활용한다. 강릉아산병원은 올 2~10월 강릉의료원 내과의사 2명을 초청해 매주 심장 초음파 검사를 참관하게 하고 질의응답을 하며 기법을 전수했다. 매년 영동지역 진료협력 심포지움과 협력병원장 초청 간담회를 연다. 암 센터, 뇌졸중 센터 심포지움을 열어 지식을 공유한다.

울산대병원 IT팀 관계자가 지역 병·의원을 방문해 전자의무기록(EMR) 연동에 필요한 전산프로그램을 설치해주고 있다. 사진 울산대병원

울산대병원 IT팀 관계자가 지역 병·의원을 방문해 전자의무기록(EMR) 연동에 필요한 전산프로그램을 설치해주고 있다. 사진 울산대병원

울산대병원은 자체 개발한 진료정보 전산체계를 지역 중소병원에 깔아주고 고장 나면 고쳐준다. 급한 치료가 끝나면 작은 병원으로 환자를 보내되 가장 적합한 데를 추천한다. 가령 당뇨병이 심한 암 환자라면 둘을 잘 하는 데를 추천하는 식이다. 이 병원 함영환 대외협력홍보팀장은 "작은 병원과 협력하기 위해 시행착오 끝에 지금 시스템을 만들었다. 환자 만족도가 높다"고 말한다. 울산의 한 중소병원 관계자는 "우리가 치료하기 힘든 환자를 울산대병원에 보내면 수술 후 우리한테 보내준다. 전문 재활은 우리가 더 잘 한다"고 말했다.

정근영 디자이너

정근영 디자이너

암 전문병원도 환자의 수도권행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화순 전남대병원이 대표적이다. 광주광역시 주모(48)씨는 이달 초 광주의 중소병원에서 대장암 진단을 받았는데, 그 병원이 화순전남대병원으로 진료를 의뢰했다. 현재 정밀 검사 중이며 내달 초 치료를 시작한다. 주씨는 "집 가까운 데서 치료할 수 있게 돼 행운"이라며 "힘들게 서울에 갈 필요가 없다고 본다. 화순전남대병원이 암에 특화돼 있다"고 말한다.

이 병원은 지난 6월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암 분야 세계 최고 병원 평가'에서 120위를 차지했다. 국립대병원 중에는 서울대와 함께 들었고, 비수도권에서는 유일하다. 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전남·광주 지역의 2019~2022년 5대 암 환자( 위·대장·간·유방·자궁경부암) 18만5890명 중 5만9654명(32.1%)이 수도권으로 간 것으로 나타났다. '수도권 유출률'이다. 충남북·세종·강원(50% 이상), 경북(40%), 대전(37.1%), 전북(35.2%)보다 낮다. 물론 대학병원이 많은 대구(17.8%), 부산(18.3%) 등보다는 높다. 정용연 화순 전남대병원장은 "우리 병원의 5년 상대생존율이 서울의 '빅7' 병원보다 미세하게 우수하다. 광주·전남 암 환자의 50% 이상을 우리가 담당한다"고 말했다. 이 병원은 올 1~9월 경기(1384명), 서울(971명), 경남(876명) 등에서도 환자가 찾아왔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경북 안동시의 안동병원도 지역 터줏대감 노릇을 한다. 이 병원은 2021년 7월~지난해 6월 중증응급환자 대부분(92.5%)의 치료를 완결했다. 전국 권역응급센터의 최종 치료율(91.6%)보다 높다. 뇌혈관 환자 중재 시술, 개두수술도 전국 평균을 크게 웃돈다. 이 병원 김권 권역응급센터장은 "근처 도시 영주시, 북쪽의 봉화, 서쪽 예천·문경·상주, 동쪽 영양까지 심뇌혈관·외상 환자의 골든타임을 지키며 커버한다"며 "최고 수준의 급여를 제공해 의사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창식 강릉아산병원장은 "우리가 흔들리면 영동지역 주민들이 불안해 한다. 국립대, 민간 병원 구분하지 말고 지역적 특성과 역할을 따져서 지역완결 의료체계를 만들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용진 서울대병원 교수는 "건강보험 재정의 1%(약 1조원)를 기금으로 조성해 지역 의료에 지원해야 한다. 지역 특성에 맞는 체계를 만들도록 지원해 '의료 자치' 근육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박은철 연세대 의대(예방의학) 교수는 "국립대병원 분원을 다 모아도 17개에 불과하다. 국립, 민간 구분없이 대형병원의 경쟁을 유도해야 한다"며 "잘 하는 데를 더 지원하면 지역 네트워크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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