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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배우고, 라마단 지키고” 수단서 온 와드의 ‘이중 생활’ [인구 절벽 시대, 다문화가 미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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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4호 08면

SPECIAL REPORT - 이주배경학생 한국 생활 동행기

옥련중에선 다문화강사를 초청해 문화이해 교육을 한다. [사진 옥련중학교]

옥련중에선 다문화강사를 초청해 문화이해 교육을 한다. [사진 옥련중학교]

“소가 뒷걸음치다가 어떻게 쥐를 잡아요?” 한국에 온 지 7년이나 지났지만 몽골 출신 배아노진(18)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히잡을 쓰면 물건을 잘 훔친다고 말하더라고요.” 9년 전 예멘에서 온 샤하드(14)는 참고 참았다.

“엄마가 한국어도 모르니 내 학교생활을 어찌 알겠냐고 아이가 투정을 부렸어요.” 한국 생활 11년 차 권선화(가명·39)씨는 눈물이 났다. 권씨는 인생의 3분의 2 이상을 중국인으로 지냈다. 하지만 지금은 배아노진양, 샤햐드양처럼 한국인이다.

다문화 가족 112만 명(2021년 기준) 시대다. 이 가족들의 자녀인 이주배경학생도 올해 18만 명을 넘어섰다. 5년 새 5만 명 넘게 늘었다. 숫자는 커졌지만, 녹록지 않은 진통이 이들의 피부밑에 숨어있다. 중앙SUNDAY는 단내 짠내 나게 생활하는 이주배경학생들과 며칠간 손을 잡고 숨을 함께 쉬었다. ‘동행’이었다. 맞다 동행 취재다.

이주배경학생 18만, 5년 새 5만명 늘어

지구촌학교의 방과후 댄스동아리 활동 모습. 최기웅·신수민 기자

지구촌학교의 방과후 댄스동아리 활동 모습. 최기웅·신수민 기자

“어디 가세요?” “지금이요? 학교 가는 시간이잖아요.” 지난 1일 오전 인천 연수구 옥련동. 기자와 와드(18)양 사이에 우문현답이 잠깐 오갔다. “아, 까먹겠네. 정조가… 뭐라더라. 탕평책! 탕평채인가 뭔가 먹을 것도 있던데.” 와드는 이날 수행평가를 앞두고 한국사를 되새기다가 점점 ‘옆길’로 빠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휴대전화를 꺼내 검색에 들어갔다. 오늘의 급식 메뉴다. “오늘은 핫도그랑 실계란국에다… 배고파”라고 혼잣말을 하던 와드는 “급식 진짜 맛있는데, 4월 라마단 때는 못 먹어서 한 달간 학교에서 물만 마셨는데, 친구들이 급식 엄청 맛있었다고 하면 샘이 나요. 그래서인지 침샘에서 침이 콸콸 나와서 더 배고파진다”며 웃픈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난도 중간 수준의 아재개그와 시적 비유. 게다가 MBTI유형 중 본인은 ISTP라고 말하는 유행습득 능력까지. 탁월한 한국 생활 적응력이었다. 다만 수행평가에서 급식메뉴라는 ‘옆길’로 빠지면서 그의 등굣길이 걱정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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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드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한국에 온 지 벌써 8년이 됐다. 와드가 사는 인천 옥련동 옛 송도유원지 일대에는 중고차매매단지가 조성돼 있는데, 옥련동과 인근 동춘동·청학동에는 중고차와 관련해서 일하는 외국인들이 많이 산다. 와드의 아버지도 중고차 바이어다. 그런데 와드의 부모님은 한국어를 잘 못 한다. 와드는 “가끔 언니들이랑 한국어로 얘기하면 엄마가 ‘나 욕하는 거지?’라며 장난 치신다”며 “요새 엄마가 결심하셨는지 다문화지원센터에서 주 2회 한국어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그래픽=양유정 기자 yang.yujeong@joongang.co.kr

“내가 네 짝이라고? 말도 안 돼.” 리사(16)가 와드에게 농담을 건넸다. 이날 옥련중(인천 연수구) 3학년 5반 교실은 짝꿍을 바꿨다.

10년 전 러시아에서 온 리사는 와드와 동문이다. 대안학교 인천한누리학교에서 함께 한국어를 배웠다. 그 뒤 다른 초등학교를 갔다가 옥련중에서 재회한 거다. 리사는 “요새는 한국말이 러시아어보다 쉬울 때가 있다”고 속삭였다. 리사 동생 샤샤(14)도 옥련중에 다닌다. 샤샤는 초등학교에 이어 중학교 1학년에도 반장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샤샤는 “6개월 전에 전학 온 한국인 친구와 학교 끝나고 떡볶이 먹으러 가기로 했다”고 자랑했다.

와드와 리사·샤샤는 외국 태생으로 입국한 학생이다. 국제결혼가정 자녀 중 국내 태생과 중도입국학생, 그리고 외국인 가정의 자녀까지 합쳐 이주배경학생이라고 부른다. 와드와 리사와 달리 인천 연수구에는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외국 학생이 두드러진다. 올해 연수구의 이주배경학생 2361명 중 외국 태생이 1626명으로 전국 3위다. 숫자도, 비율도 유독 높다. 연수구 연수동 함박마을엔 외국어만 들릴 정도다. 방과 후 마리어린이공원에는 이주배경 초등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든다. 박봉수 디아스포라연구소장은 “문학산 자락을 따라 이주벨트가 형성돼 있는데, 옥련동엔 중동권에서 온 무슬림 외국인이 4000명 정도 있고, 청학동·연수동엔 고려인을 포함 시리아, 동남아시아 외국인이 밀집해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다문화 가정과 자녀 수가 늘면서 정부는 교육 정책을 다시 짰다. 옥련중은 올해부터 시범 운영하는 다문화교육 정책학교 중 하나다. 가나·러시아·수단·이집트·중국 등 17개국 출신 학생이 학급당 1~2명 배치돼 있다. 무학년제로 한국어학급도 운영한다. 전국적으로 한국어학급 수는 늘고 있다. 2020년 372개에서 2022년 444개로 3년 새 72개가 늘었다. 이주배경학생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한국어는 이주배경학생이 디뎌야 할 첫 계단이자 넘어야 할 큰 벽이다. 옥련중 한국어학급 학생인 예맨 출신 샤하드(14)는 히잡을 쓰고 있었다. 그는 “히잡이 불편한 적이 있었다. 벗고 다니고 싶을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왜 그랬나요?”(기자) “학교에서 놀림을 받았어요.”(샤하드) “아, 이런. 어떻게….” “히잡 쓰면 물건을 잘 훔친다, 히잡 벗으면 알라신이 쫓아온다, 뭐 이런 거요.” “지금은 마음이 어때요?” “아버지가 ‘여자는 보석이다. 절대 싸우지 말자’고 위로해 주셨어요. 참고 참았어요. 제가 ‘한국 친구들은 돼지고기를 왜 먹지?’라고 생각했어요. 입장을 바꿔 봤어요. 한국 친구들도 저 보고 ‘히잡을 왜 쓰지’ 생각하겠더라고요.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하지요? 그때부터 상대방 입장을 항상 생각하게 됐어요. 마음이 편해요 이제.” 샤하드와 히잡 얘기를 하다가 한국어 실력에 놀랐다. 그는 전국적으로 예선-본선을 거쳐 시행하는 이중언어말하기대회에 나갈 계획을 잡고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우리 언니가 나가서 상을 탔는데, 은근히 경쟁심이 생긴다”며 “한국어 공부, 정복해야죠”라고 했다.

“능글능글, 한국인보다 한국 말 더 잘해”

안산 다문화음식문화거리 전경. 최기웅·신수민 기자

안산 다문화음식문화거리 전경. 최기웅·신수민 기자

“이모, 오랜만이죠. 맛있는 거로 주세요.”

경기도 안산 원곡동 다문화특구. 6개월 전 네팔에서 한국을 다시 온 람(가명·33)씨를 지난 4일 만났다. ‘이모’라는 사람은 ‘이모씨’도 아니고 진짜 이모도 아닌 과일가게 사장님 나주연(가명·59)씨다. 이곳에서 10년 넘게 가게를 지키고 있다. “어휴, 능글능글하게 한국어를 잘해. 어떨 때는 나보다 낫다니까.” 나씨는 람씨에게 사과를 건네주면서 웃었다. 나씨는 “람처럼 어느 정도 한국말을 할 줄 알게 되면 다시 자국에 갔다가 아예 한국에 취업해 정착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전국 1위, 7300여 명의 이주배경학생이 이곳 안산에 있다. 올해 안산시 인구 중 외국인 주민 비중은 11.6%로 매년 증가세다. 단원구 원곡동과 뗏골마을이 다문화 가족이 밀집해 있는데, 최근엔 선부동·초지동·고잔동 등으로도 넓히고 있다. 원곡동 다문화특구 상가 거리엔 ‘500 / 个’(1개에 500원) ‘2000 芹菜’(미나리 2000원) 등 외국어로 쓰인 자판대 사이로 외국인들이 쉴 새 없이 몰려들었다.

“우크라이나를 도와주세요!” 우크라이나 국기를 두른 시위행렬대가 지나가자 김려화(45·중국 출신)씨가 뛰어나와 영상을 찍었다. 김씨는 20여년간 한국 다문화사회를 몸으로 부딪히며 경험했다. 20세에 부산에서 식당 일을 하다가 안산에 정착해 이중언어 능력을 살려 외국인을 대상으로 보험·휴대전화 판매업을 하고 있다. 김씨는 “나 때는 ‘겨울연가’ 보면서 한국어 공부했는데, 요새는 교육이 잘 돼 있나 보다”고 말하는 순간, 요동치는 휴대전화 통화 버튼을 누르고는 중국어를 쏟아냈다. 전화를 끊고 다시 한국어로 인터뷰를 이어갔다. 김씨처럼 한국어에 능숙하게 되기까지 쉽지 않다.

안산 다문화거리의 가게 매대에 외국어 가격표가 놓여있다. 신수민 기자

안산 다문화거리의 가게 매대에 외국어 가격표가 놓여있다. 신수민 기자

지난 6일 서울 광진구의 외국인학교인 재한몽골학교에서 만난 배아노진은 이전에 다닌 한국 일반학교에서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한국어가 안 됐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기 힘들었다. 4년전 한국에 온 엔느자르(12)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어 습득-교제 통한 한국 문화 이해-교육 심화-사회 진출로 이어지는 한국 정착의 소프트랜딩이 출발부터 틀어질 수 있었다. 이 학교에서 한국어 수업을 가르치고 있는 이규영(58) 강사는 “며칠 전 한국어 중간고사를 본 한 친구가 울며 찾아왔다. 본인들도 한국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안다. 열심히 했는데, 마음이 찡하다”고 말했다. 이 강사는 “사실 중도입국자 학생들은 한국 문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 흡수를 빨리 못하고 정체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어 최상위반까지 오른 배아노진은 “대입을 슬슬 준비해야 하는데(웃음), 좋은 대학 경영학과에 가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이주배경학생만큼이나 그 부모의 교육열도 만만치 않다. 오후 3시 10분. 인천 옥련중의 학교 종이 울리자 학생들이 몰려나왔다. 이집트 출신 나다(15)는 “이제 수학학원이랑 아랍어학원에 가야 해서 오늘도 바쁘다”며 “복싱학원 가서 잽 날리면서 스트레스 풀 거다”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엄마가 몰고 온 차에 올랐다. 안산의 이주배경학생 학부모 수십 명은 오후 4시만 되면 애들 가방을 메고 어디론가 향한다. 단원구 초지동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다. 이곳에서는 방과후강의 형태로 그림책언어교실부터 태권도·난타 그리고 초중고 대상 모국어 수업과 한국어 수업을 진행한다. 중국 출신 권선화씨도, 우즈베키스탄 출신 김알료(33)씨도 “애들이 한국말 잘 못 할까 봐 걱정이 커 이곳에 보냈다”며 한국어 수업을 마치는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문화지원센터 등록 대기자 넘쳐

이 부모들도 한국어 수업에 뛰어들기도 한다. 한국에서 살기 위해, 그리고 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권선화씨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큰 애가 나름 학교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엄마는 한국어도 모르니까 한국 학교생활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며 눈물을 뚝뚝 흘리더라”며 “충격을 받고 센터에서 남편과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7년 전 태국에서 온 결혼이주여성인 나다(36)씨는 “요새 아이랑 대화하려고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여성가족부 설문조사에 따르면 결혼이민자의 자녀 양육 고민 중 ‘학습지도, 학업관리 어려움’(50.4%)이 절반을 차지했다. ‘학업·진로 등에 관한 정보 부족(37.6%)’, ‘자녀와의 대화 부족(11.2%)’ 등의 고민도 있었다. 이들의 교육열을 해소하기 위한 안산 다문화가족지원센터 같은 곳은 등록 대기자가 꽉꽉 찬 상태일 정도로 인기다. 매월 재등록일에는 ‘오픈런’이 벌어질 지경이다. 300명 정원에 80%가 외국인인 재한몽골학교 같은 외국인학교, 대안학교도 입학 대기정원이 늘고 있다.

“짧은 청바지의 반대말은 뭘까요?” “길은 청바지?” “아니오. ‘길은’이 아닌 ‘긴’ 청바지죠?” 서울 광진구 재한몽골학교에서는 왁자지껄 한국어 수업이 한창이었다. 안산의 선일초에서는 다문화학생이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언어교환퀴즈대회가 열렸다. 다시 인천의 옥련중. 기사 초반 ‘탕평책에서 탕평채’로 빠졌던 와드가 수업을 마치고 나왔다. 어쩐지 발걸음이 가볍다. 와드는 “수행평가를 완벽하게 봤다”고 말했다. 와드는 보건고 진학을 준비 중이다. “꿈은 엄마, 아빠처럼 한국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라고 소박하게 말했다. ‘한국 사람’ 와드의 하굣길 배경에 음악을 깔아주고 싶은데, 본인이 흥얼거렸다. “모두 높은 곳으로 우러러볼 때 난 내 물결을 따라 Flow flow along…(악동뮤지션 ‘후라이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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