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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문턱, 투옥, 대통령…“파란만장 85년, 후회는 없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 최종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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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김대중 육성 회고록 〈최종회〉

김대중 대통령이 2003년 2월 24일 청와대에서 마지막 국무회의를 주재하기에 앞서 ‘위대한 국민에의 헌사’라는 제목의 퇴임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대중 대통령이 2003년 2월 24일 청와대에서 마지막 국무회의를 주재하기에 앞서 ‘위대한 국민에의 헌사’라는 제목의 퇴임 인사말을 전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8년 6월 16일의 일이다. 당시 83세의 정주영(1915~2001)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500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는 감동적인 장면을 펼쳤다. 나, 김대중(DJ)이 미국 국빈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지 이틀 만이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나는 “행인의 외투를 벗기기 위해서는 강력한 바람보다 햇볕이 효과적”이라는 공감대를 끌어냈다. 햇볕정책의 실행을 고민하던 차에 정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이 물꼬를 터줬다.

소떼 행렬에는 분단과 냉전의 상징인 판문점이 남북 간에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교류의 장(場)으로 승화하는 역사적 의미가 담겼다. 햇볕정책의 미래와 가능성이 엿보였다. 북한이 한겨울에 따뜻한 햇볕을 쬐고 장갑 한 짝 겨우 벗은 정도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소떼 방북 두 달 뒤 북한은 함경북도 화대군 무수단리에서 ‘대포동 1호’ 미사일을 쐈다. 북한 최초의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였다. 1550㎞를 날아간 뒤 일본 북동쪽 750㎞ 떨어진 태평양 공해 상에 떨어졌다. 미국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북한이 하와이 등 미국 영토에 도달할 수 있는 탄도미사일을 개발할 능력이 있음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대포동 발사에 이어 ‘금창리 지하시설 핵 의혹’까지 덮쳤다. 뉴욕타임스(NYT)는 “영변 북방 40㎞ 지점인 금창리에서 핵무기 개발에 사용될 수 있는 지하시설이 포착됐다”며 북한의 핵 재개발 의혹을 보도했다. 북한의 핵 개발을 동결시킨 94년 미국과 북한 간의 ‘제네바 합의’를 파기했다는 것이다.

그해 11월 21일 서울에서 열린 2차 한·미 정상회담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대북 정책 조정관으로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을 지명했다고 통보했다. 페리는 국방부 장관 시절이던 94년 봄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하자 ‘북폭론(北爆論)’을 추진한 강경파였다. ‘대포동 미사일-금창리 의혹-페리 지명’이 햇볕정책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전조였다.

“김정일 이상한 사람 아니다”

미국 현직 장관으로 사상 처음 방북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부 장관(왼쪽)이 2000년 10월 23일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서 북한 김정일과 건배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미국 현직 장관으로 사상 처음 방북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부 장관(왼쪽)이 2000년 10월 23일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서 북한 김정일과 건배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듬해인 99년 3월 페리 조정관이 청와대를 찾아왔다. 페리는 ▶현상 유지 ▶매수 ▶북한 개혁 ▶북한 체제 전복 ▶상호 위협 감소를 위한 협상 등 다섯 가지 방안을 제시한 뒤 ‘협상’을 현실성 있는 최적안으로 꼽았다.

이어 ‘페리 프로세스(Perry Process)’로 불린 페리 조정관의 ‘대북 정책 권고 보고서’도 공개됐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중단,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완화, 외교 관계 정상화 및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내용을 담았다. 미국과 북한 간 관계 정상화를 위한 로드맵이었다. ‘페리 프로세스’ 덕에 나의 햇볕정책은 위기를 벗어나 본궤도에 올랐고, 2000년 6월 13~15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란 꽃을 피웠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도 급진전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부 장관은 미국 현직 장관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그해 10월 북한을 방문했다. 그는 평양 방문을 마치고 바로 서울로 왔다.

(김대중) “김정일을 만나 보니 어떻습니까?”

(올브라이트)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만나 보니 김 대통령 말이 맞습니다. 그는 아는 것이 많았고 지역 문제에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시의 당선…클린턴의 방북 불발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3월 8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3월 8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이제 클린턴의 방북과 김정일과의 정상회담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다. 그런데 클린턴의 임기는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43대 미 대통령을 뽑는 선거는 11월 7일 실시됐다. 클린턴 행정부의 부통령인 앨 고어 민주당 후보와 조지 W 부시 공화당 후보가 접전을 벌였다.

나는 내심 고어 후보가 당선되기를 바랐다. 고어라면 클린턴의 노선을 계승할 것이라 봤다. 아쉽게도 부시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됐다. 그리고 퇴임을 한 달 앞둔 클린턴에게서 12월 21일 전화가 왔다. 당시 비밀에 부치자고 했던 대화 내용이다.

(클린턴) “중동 평화 협상이 성공적으로 결론 날 것 같은데 퇴임 전에 기회를 잡고 싶습니다. 그래서 북한 방문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대신 1월 중 워싱턴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초청할까 합니다.”

(김대중) “북한은 대통령의 임기 중에 (관계 정상화를) 해결하기를 원합니다. 김정일 위원장이 워싱턴에 가서 소득 없이 돌아가는 것은 곤란할 것입니다.”

클린턴은 12월 28일 “북한을 방문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고, 김정일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 방문을 요청했다. 북한은 이 제안을 거절했다.

‘악의 축’ 지목된 북한 “전쟁 불사”

나는 부시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1년 3월 미국 워싱턴DC로 달려갔다. 부시는 기자회견장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독재자다. 국민에게 밥도 못 먹이고 있다”며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기자회견 도중 무례한 태도까지 보였다. 심지어 나를 ‘디스 맨(This man, 이 양반)’이라고 호칭했다. 매우 불쾌했다.

부시 정부와의 관계가 순탄치 않으리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당시 부시는 ‘ABC(Anything But Clinton)’ 정책을 폈다. 전임자인 클린턴이 한 정책은 모두 반대한다는 의미다. 클린턴이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한 것도 뒤집어 버렸다. 내가 미워서가 아니라 클린턴이 미워서 그런 거라 생각했다.

부시의 톤은 점점 강해졌다. 나의 임기 마지막 해인 2002년 새해, 부시는 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이란·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지목했다. 햇볕정책과 악의 축 사이의 거리는 너무 멀었다.

그해 10월 북한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가 부시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그런데 회의 도중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고농축 우라늄의 존재를 시인한 뒤 “전쟁을 하자면 할 용의가 있다. 우리를 못살게 굴면 우리도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폭탄 발언을 했다.

나는 강석주의 발언에 낙담했다.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보유를 인정했으니 미국과의 관계는 파탄 나고, 그토록 공들인 남북관계도 악화할 것이 뻔했다. 햇볕정책의 유보와 폐기가 언론에 오르내렸다.

미국과 북한은 수교 직전까지 갔다. 바로 그 시기에 부시 정권이 들어섰다. 내가 클린턴과 함께 추진한 대북 정책을 부시 정부가 들어와 뒤집어엎었다. 내 임기는 한계가 있고, 사태는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반전이나 개선을 꾀할 수 있는 방도가 막막했다. 대통령 재임 중 가장 안타까운 일이었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클린턴이 평양에 갔더라면, 미 대선에서 민주당 고어가 당선됐더라면, 중동 평화회담이 그 시기에 진척되지 않았더라면, 김정일이 워싱턴을 방문했더라면 오늘의 한반도에는 전혀 새로운 역사가 펼쳐졌을 것이다.

투석 중 41차례 육성 녹화

나는 2003년 2월 퇴임 후 신장 혈액 투석을 받으면서도 2006년 7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41회에 걸쳐 육성과 함께 동영상으로 나의 이야기를 남겼다. 이후 정리된 원고를 읽으며 직접 고쳐 2009년 7월 마무리했다. 그 직후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세상과 이별할 준비를 했다. 내 나이 85세가 되던 해였다.

나는 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 민족 문제, 즉 분단된 조국의 통일 문제를 한시도 머리에서 잊지 않았다. ‘뜨거운 가슴과 냉철한 머리’로 접근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일은 가장 자랑스럽고 뜻깊다.

그때까지 등을 돌려 서로 적대시하던 남북 관계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손을 잡고 가까이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우리 민족이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안심하고 평화적으로 사는 시대를 만들었다. 서로 협력해서 민족이 통일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는 점을 기쁘게 생각한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

김대중 육성 회고록

나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다섯 번 죽음의 고비, 6년의 옥중 생활, 끊임없는 감시와 연금, 망명 생활을 극복했다. 민주주의를 위해 온몸을 바쳐 투쟁했고, 외환위기에 빠진 한국 경제를 살렸으며, 포용정책을 통해 남북 화해의 길을 여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살아온 길에 미흡한 점은 있으나 후회는 없다. 정의의 편에 서 준 역사와 국민에게 무한히 감사한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열독해주신 독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QR코드를 스캔하면 더중앙플러스에서 회고록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158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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