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중대재해법 적용 확대보다 합리적 개선이 먼저여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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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7월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이행점검 전체 회의에 참석해 인사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이 지난 7월 세종시 정부세종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이행점검 전체 회의에 참석해 인사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50인 미만 사업장 83만 곳 내년부터 적용은 무리  

법률 조항 명확하게 고쳐 현장 혼란부터 줄여야

중소기업들이 내년 1월 27일부터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 적용되는 중대재해처벌법의 적용 유예를 요구하고 있다. 현장에서 안전보건 관리체계를 구축하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하고 그냥 시행될 경우 산업재해는 줄이지 못하면서 사업주만 무더기로 처벌받게 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중소기업인의 이런 하소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은 전국 83만 개에 달한다. 산업 생태계의 맨 밑바닥에서 버티고 있는 뿌리기업이 많다. 겉으론 잘 드러나지 않지만 제조업 전반에 걸쳐 사용되는 주조·금형 등 공정기술로 부품과 소재를 생산하는 귀중한 기업들이다.

하지만 법이 시행된 후 컨설팅이나 기술지도, 교육 등의 정부 지원을 한 번이라도 받은 곳은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은 최근 국정감사에서 “예산이나 인력 등 지원을 많이 했지만, (확대 적용 대상인) 83만 개 사업장 중 40만 사업장에 대해서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 싶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법이 시행되면 오너 범법자가 양산되고 뿌리기업의 폐업이 잇따를 수 있다는 중소기업중앙회의 걱정이 괜한 엄살 같지는 않다. 실제로 회사 운영 전반에 걸쳐 오너 개인에 많이 의존하는 중소기업에서 오너의 부재는 기업의 생사를 가를 수 있다.

법 시행 2년 가까이 됐는데도 현장의 혼선은 여전하다. 법 조항이 모호하고 매뉴얼과 각종 절차서 등 서류작업이 너무 많다는 불평이 나온 지는 오래됐다. 정작 산업재해와 사망을 줄이는 효과는 분명하게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법 시행 이후 산업재해 피해자와 사망자 모두 늘었다. 경총 등 경제 6단체는 야당의 노동조합법 2, 3조 개정(노란봉투법) 반대, 중대재해처벌법 개정과 함께 50인 미만 사업장에 법 적용을 2년 더 유예해 달라는 내용의 성명을 지난주 발표했다.

중대재해처벌법 확대 적용에 앞서 법 조항을 합리적으로 개선해 실효성부터 높여야 한다.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법 조항의 모호성을 줄여 지킬 수 있는 법으로 만들어야 한다. 무엇을 위반하면 누가 어떻게 처벌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어야 현장의 혼선이 사라진다. 기업인들은 법에 헷갈리는 부분이 너무 많아 법원 판례가 쌓일 때까지 기다려야 감이라도 잡을 것 같다고 말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법은 명확해야 한다.

노동계는 더 강한 법 적용을 원한다. 전체 산재의 80%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만큼 적용 유예에도 반대한다. 하지만 산재 통계가 보여주듯 강한 규제가 반드시 의도했던 선한 결과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 국회에서 정부·여당과 야당이 머리를 맞대고 합리적 해법을 내놓기를 기대한다. 총선을 앞두고 바쁘다는 핑계로 법 개정을 미루면 영세 중소기업과 근로자들만 고달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