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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린턴 “한반도 문제, DJ가 운전대 잡고 나는 조수석 앉겠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 2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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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김대중 육성 회고록 〈23〉

1998년 6월 9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함께 공동 기자회견을 하던 중 질문자를 지정하고 있다. [중앙포토,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98년 6월 9일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빌 클린턴 미 대통령과 함께 공동 기자회견을 하던 중 질문자를 지정하고 있다. [중앙포토,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햇볕정책은 미국의 성공에서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냉전체제를 유지했습니다. 결국 돌아온 것은 무기 경쟁뿐이었고, 공멸의 위기감이 높아졌습니다. 미국은 1970년대 중반부터 데탕트 정책으로 바꿨습니다. 15년 정도 지나니 소련이 스스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 1998년 6월 9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인 오벌오피스에서 나, 김대중(DJ)과 클린턴의 단독회담이 진행됐다. 상견례 성격의 자리였지만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이유가 있었다. 클린턴이 회담 막판에 내게 ‘햇볕정책’의 배경과 내용을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중국과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화해 정책이 성공한 사례를 거론한 뒤 쿠바와 북한의 경우를 언급했다.

“쿠바를 봉쇄하며 압박했지만 굴복시키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는 문을 열면 망하고, 닫으면 강해집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주의를 대할 때 군사적 힘으로 도발은 막고, 다른 한쪽으로는 개방을 유도해야 합니다.”

나는 햇볕정책을 “찬바람 대신 따뜻한 햇볕을 서로 보내면서 화해해 나가자는 것”이라고 압축했다. 클린턴은 전폭적인 지지를 표하며 화답했다.

“김 대통령이 운전대를 잡고, 나는 조수석으로 옮겨 보조적 역할을 하겠습니다. 김 대통령의 비중과 경륜으로 볼 때 이제 한반도 문제를 주도해 주기 바랍니다.”

“외투 벗기려면 햇볕이 효과적”

1998년 6월 10일 미국 상·하원 의원들이 모인 워싱턴DC 하원 본회의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중앙포토,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98년 6월 10일 미국 상·하원 의원들이 모인 워싱턴DC 하원 본회의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중앙포토,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클린턴은 햇볕정책을 원활히 추진하려면 미 의회를 설득하라고 조언했다. 나는 정상회담 다음 날 미 의사당의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했다.

당시 미 의회는 여소야대였기에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완화 등 가시적 성과를 위해선 의회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연설문을 고치고 또 고친 끝에 전날 밤에야 마무리했다. 긴장한 상태로 본회의장에 들어갔다.

“행인의 외투를 벗기기 위해서는 강력한 바람보다 햇볕이 더욱 효과적입니다. 북한을 화해로 이끌기 위해 개방을 유도하는 햇볕정책을 추구해 개방의 길로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방미는 성공적이었다. 나는 미국 정부와 의회에서 이산가족 상봉 등 남북 당사자 간 문제는 한국이 주도적으로 해결해 나간다는 원칙을 인정받았다. 햇볕정책이 임기 첫해부터 힘을 받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

여기서 나의 통일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북에 대해 3대 원칙을 천명했다. 북한의 어떠한 무력 도발도 용납하지 않고,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고, 화해 협력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북한이 공존의 길로 나올 것으로 믿고, 그 길로 나오도록 유도하고 지원하는 방향을 추진하기로 했다. 이게 바로 햇볕정책의 대원칙이다.

이런 통일관은 1963년 6대 의원 때 형성됐다. 당시 통일이라고 하면 ‘북진통일’ 혹은 ‘흡수통일’이라는 개념밖에 없었다. “공산주의를 타도하고 말살하면서 통일하자”가 구호였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남북관계를 완전히 차단했다. 심지어 북한의 위협을 이용해 정권을 유지하려 했다. 국민을 속이기 위해 ‘선(先) 건설-후(後) 통일’ 정책을 앞세웠다. 후통일이란 통일에 별로 뜻이 없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북한과 대화와 협력을 통해 통일한다는 발상은 전혀 없었다. 북한이 저절로 망하거나 무력으로 흡수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야당과 시민사회에서도 통일론 논의를 꺼렸다. 대폿집에서 통일 얘기 한마디 잘못했다가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당장 닥쳐올 위협과 억압은 피하고 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박정희·김일성, 독재 위해 통일론 이용

1995년 9월 14일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 출판 기념회장에 걸린 축하 그림. [중앙포토,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995년 9월 14일 『김대중의 3단계 통일론』 출판 기념회장에 걸린 축하 그림. [중앙포토,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나는 북진통일 혹은 선경제-후통일 방안에 회의를 품었다. 6·25에 이어 두 번째 전쟁을 불사해야 하는 북진통일은 엄청난 희생을 전제로 한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재연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강대국의 놀음에 놀아나 영구 분단이나 무력 재충돌의 길로 가면 안 된다고 확신했다.

선경제-후통일 또한 그 시점이 막연하고 모호했다. 1300년간 통일된 이 민족이 영원히 통일하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전쟁과 흡수통일 방식은 갈등을 조장하고, 통일을 하더라도 후유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공존과 교류를 바탕으로 한 ‘평화통일론’을 구상하게 됐다.

71년 4·27 대선을 앞두고 나의 통일론을 더 정교하게 다듬었다. 단계적으로 서로 화해하고 협력해 가는 ‘3단계 통일론’을 주창했다. ‘평화공존→평화교류→평화통일’로 가는 인식의 대전환을 내걸었다. 동족끼리 전쟁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평화공존), 경제·문화·예술·스포츠 교류를 앞당기고(평화교류), 완전 통일에 대한 민족적 합의(평화통일) 과정을 거치면 성취될 수 있다고 봤다.

박정희 정권이 반공·승공·멸공을 내세우던 시절에 나의 3단계 통일론은 지금 생각해도 혁신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71년 대선에서 내가 공약으로 내건 평화통일론에 혼이 났다. 이듬해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라는 평화통일 3대 원칙을 천명한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7·4 성명의 속셈은 국민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려는 의도였다. 통일 논의나 교류 등 남북관계 개선 노력은 전혀 없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3개월 뒤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통일을 구실로 영구 집권을 강화하는 유신 체제를 구축했다.

북한 김일성도 수상에서 주석으로 스스로 올라서 장기 독재의 발판을 마련했다. 박정희와 김일성 둘 다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유지하는 방편으로 통일론을 이용했다.

‘태양정책’에서 ‘햇볕정책’으로

나의 평화통일론은 90년대에는 ‘남북연합→남북연방→완전통일’로 진화했다. 햇볕정책이라는 명칭은 94년 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처음 사용했다.

미국 보수 진영의 헤리티지재단 연설에서다. “강한 의지에 입각한 태양정책”이란 주제였다. 당시에는 ‘햇볕’이 아닌 ‘태양’이라고 했다.

“미국의 외교 정책은 침략이나 영토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한 ‘태양정책’을 적용한 곳에서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강풍정책’만 적용한 데에서는 전체주의 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전자의 예는 소련·동유럽·중국 등이고, 후자의 경우는 베트남·쿠바·북한 등입니다. 우리는 따뜻한 태양빛 아래 북한과 공동 번영 및 민족 통일의 길로 함께 나갈 것을 원합니다.”

한반도 냉전 구조를 해체하기 위한 나의 통일론에는 독일 통일 과정이 큰 영향을 끼쳤다. 독일 통일의 주춧돌을 쌓은 인물은 빌리 브란트(1913~92) 서독 총리다. 브란트 집권 전 서독은 55년부터 할슈타인 원칙(Hallstein Doctrine)을 유지했다. 동독과 수교한 나라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사회민주당(SPD) 출신의 브란트는 69년 총리에 취임하면서 동방정책(Ostpolitik)으로 전환에 나섰다. 그는 동독을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고, 동유럽 공산권과의 관계를 정상화했다. 독일 다수의 사람이 동방정책을 지지했다. 통일은 장차 하더라도 대화를 통해 모든 것을 풀어가고, 교류 협력을 하자는 데 공감대를 모았다.

나는 66년과 72년 서독을 방문해 변화의 움직임을 직접 목격했다. 이곳에서 영감을 얻었고, 나의 평화통일론과 햇볕정책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다.

서독, 흡수통일 망했을 수도 있어

베를린 장벽이 그렇게 빨리 무너질지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급격한 흡수통일은 서독의 본의가 아니었다. 우리와 똑같이 점진적 통일을 원했다. 그런데 결과는 흡수통일이었다.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엄청난 통일 비용이 들어가고, 동서독 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서독의 탄탄한 경제력이 아니었다면 독일은 망했을 수도 있었다.

우리도 통일을 급격히 추진해서는 안 된다. 통일에 앞서 남북의 사람들이 자주 왕래하고 접촉하면서 북한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켜야 한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 23

김대중 육성 회고록 23

6월의 한미 정상회담 직후 83세의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을 방문했다. 이어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고, 남북 간 화해 무드가 무르익어 갔다.

나의 햇볕정책에 물꼬가 트였다.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 중인 ‘김대중 육성 회고록’ 전문은 QR코드를 스캔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90424

24회 〈정주영의 소떼 방북〉이 이어집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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