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양식들
김병익 지음
문학과지성사
문학평론가이자, 1970년대 시작한 계간지·출판사 이름처럼 ‘문학과 지성’을 일궈온 저자의 글 모음이다. 평론·산문·칼럼집이 아닌 데서 짐작하듯, 발표한 지면이나 쓰게 된 계기가 다양하다. 어떤 계기든 의례적인 글에 그치는 경우는 없다. 문명과 세태에 대한 비평이 곳곳에 번득인다.
수십 년 전 글도 여럿인데, 독자로선 아무래도 현재와 공명하는 지점을 찾게 된다. 1960년대 “연대감 없는 세대교체는 역사와 전통의 단절”이라고 쓴 대목(‘문단의 세대연대론’에서)은 올초 일간지 대담을 수록한 글의 “젊은 세대에 대해 내가 기대를 하고 좋게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만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건 관용”이란 대목과 함께 보게 된다. 매국노 이완용에게 손병희 선생이 3·1 독립선언 운동 참여를 권했고 이완용이 이를 사양했다는 이야기의 진위를 궁금해 하며 시작한 2019년의 글 ‘인간 이해의 착잡함’은 같은 해의 다른 글 ‘포용과 배제’와도 겹쳐진다. 최인훈의 문학에 대한 1968년의 글은 2018년 그의 별세 직후 쓴 영결사와 나란히 실렸다.
특히 김수영·최일남·이청준·오규원 등 문학인에 대한 글은 구체적 인연이 담겨 있어 한결 흥미롭게 읽힌다. 책 말미의 ‘책, 그 질긴 인연’은 삶의 궤적을 간추린 글로도 다가온다. 저자는 이렇게 썼다. “책이란, 그리고 그 책 읽기란, ‘인생’이란 진지한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그것의 존재론적 무화(無化)를 깨닫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자→기자→편집자→저자→역자→발행인, 다시 독자로의 귀환이라는 끈질긴 인연에도 불구하고, 나는 충만했던 것도 아니지만 공허를 벗어난 것도 아니었다.” 기자 시절 인터뷰를 거절당한 박경리 선생에게서 ‘작가의 품위’를 알게 된 경험, 엄혹했던 시절 이런저런 책을 출간하며 검열을 피하기 위해 동원한 방법, 최근의 독서법 등도 이 글에 나온다.
그는 자유 지식인, 즉 “특정 분야에 매달리기보다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종합적인 시선, 포괄적인 이해를 통한 역사적 전망을 지향하는” 지식인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이런 그가 지금 “빛나면서도 번쩍이지 않는” 품위, ‘검소한 풍요’ ‘성장 없는 발전’ ‘경쟁하는 공존’을 말하는 이유를 곱씹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