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하마스가 푸틴에게 준 선물" 이스라엘 전쟁에 러가 웃는다

중앙일보

입력

지난 7일 시작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의 무력 충돌이 20개월째 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러시아에 호재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생일(10월 7일)에 터진 이번 분쟁을 두고 “하마스가 푸틴에게 준 선물”이라고 표현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분쟁이 러시아에 유리한 이유는 대략 3가지로 정리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부터 국내외 시선을 돌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 지원을 고갈시키며 ▶국제사회에 푸틴 대통령이 원하는 새로운 질서 구축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 등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8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3회 일대일로(육·해상 신실크로드) 국제협력 정상포럼에 참석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8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3회 일대일로(육·해상 신실크로드) 국제협력 정상포럼에 참석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우크라에 쏠린 눈 돌렸다"

전문가들은 이번 분쟁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에 집중하던 서방의 시선이 중동으로 분산됐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지원자인 미국이 전통의 우방인 이스라엘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18일 이스라엘을 직접 찾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향후 행보를 논의했다. 만약 이란이 지원하는 레바논 무장 세력 헤즈볼라까지 개입한다면 미국 병력을 투입하는 시나리오도 검토하고 있다. 이미 미국은 확전 방지를 위해 동지중해 해역에 핵추진 항공모함 2척(제럴드 포드·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을 배치한 상태다.

미 안보전문 싱크탱크 스팀슨 센터는 "미국이 이 전쟁에 더 직접적으로 개입하면, 바이든 행정부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에 집중하기 위해 중동내 역할을 줄이려던 입장을 뒤집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 

또 내년 3월 대선을 앞둔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반대하는 여론이 커지는 걸 경계했는데, 이번 분쟁으로 국내 관심도 돌릴 수 있게 됐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실제로 지난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남부 지역 기습 공격 이후, 러시아 매체들은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 서방에서의 친(親)팔레스타인 시위 등 관련 보도에 주력하고 있다.  

서방 관심과 지원 고갈될 듯

지난 8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한 쇼핑몰 스크린에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에 연대하는 움직임으로 이스라엘 국기가 나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8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한 쇼핑몰 스크린에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의 기습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에 연대하는 움직임으로 이스라엘 국기가 나오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 지원도 줄어들 가능성이 높아졌다. 미국은 2~3개 전선도 끄덕없다고 강조하고 있지만,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분쟁이 장기전으로 갈 경우 우크라이나 지원 여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우크라이나군 정보당국 수장인 키릴로 부다노우는 "이스라엘-하마스의 몇 주 분쟁은 걱정할 것이 없지만, 상황이 계속된다면 우리 외에 이스라엘도 무기와 탄약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내에서도 현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 외교관 콘스탄틴 가브릴로프는 이즈베스티야와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로 서방이 우크라이나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군사 지원의 양은 감소할 것이고 전황은 러시아에 급격히 유리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동전쟁으로 확대된다면 러시아에 대한 서방 제재도 무용지물이 될 거란 예상도 나온다. 중동은 러시아가 서방으로부터 석유와 가스 수출을 제한받은 이후 대체 공급지 역할을 해왔는데, 중동의 여러 국가가 이번 분쟁에 휩싸여 에너지 위기로 번질 경우 서방 제재는 무력화될 수 있다고 WSJ는 지적했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지난 18일 독일 서부지역 보훔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석해 소리치고 있다. AP=연합뉴스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지난 18일 독일 서부지역 보훔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석해 소리치고 있다. AP=연합뉴스

아울러 최근 반(反)러시아 단일대오 전선에 균열이 생긴 유럽에선 이번 분쟁으로 사회적 결속이 더욱 약화할 수 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진단했다. 독일·프랑스·영국 등에서 반유대주의 범죄와 친팔레스타인 시위가 일어나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졌고, 유럽연합(EU) 27개국 정상들도 이번 분쟁을 두고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해 중립 입장이었던 인도·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 등도 러시아쪽으로 추가 기울 가능성이 커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서방 일부 관리들은 그간 이 나라들에 국제법을 위반하는 러시아를 따돌려야 한다고 설득했는데, 미국 등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대한 공격을 지지하면서 독이 됐다고 경고했다. 

러 주도 세계 질서 구축 기회 

이로 인해 푸틴 대통령에겐 국제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WSJ는 러시아 등 미국의 주요 지정학적 경쟁국이 이번 사태를 이용해 힘의 균형을 흔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2020년 1월 30일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회담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지난 2020년 1월 30일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회담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푸틴 대통령은 이달 초 발다이 클럽 회의에서 "러시아의 임무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는데, 때마침 이번 분쟁이 터졌다. 이후 러시아는 이란과 대척점에 있는 미국에 대한 비난을 강화하는 한편 이란의 천적인 이스라엘과는 미묘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네타냐후 총리와 분쟁이 발발한지 9일이나 지나서 통화했고, 이번 사태와 관련해 러시아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한 초안에는 하마스를 언급하지 않았다.  

로먼 룰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고문은 "하마스와 우호적인 관계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지는 푸틴 대통령이 중국·이란과 함께 서방을 상대로 한 세계적인 재편에서 자신을 중요한 인물로 부각시키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스팀슨 센터도 지정학적으로 이번 사태는 러시아·중국·이란의 비공식 동맹이 커지고 있는 걸 보여준다고 전했다. 

러가 분쟁 배후? 증거 없어 

이 같은 이점으로 이번 분쟁 배후에 러시아가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러시아가 그동안 하마스와 '친분'을 쌓아온 건 사실이다.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하마스 고위급 지도자들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하마스는 지난 14일 "우리 국민에 대한 지속적인 공격과 가자지구 포위, 구호물자 차단 등을 반대한 푸틴 대통령의 입장에 감사한다"는 성명도 발표했다.

다만 러시아가 이번 분쟁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BBC방송은 전했다. 제임스 마틴 비확산센터(CNS)의 한나 노테 연구원은 "러시아는 하마스를 테러조직으로 선언한 적이 없고, 러시아 시스템이 이란을 통해 하마스로 진출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면서도 "그렇다고 러시아가 하마스에 광범위한 군사 지원을 했다고 보진 않는다"고 전했다. 알렉산드르 벤 즈비 러시아 주재 이스라엘 대사도 "우리는 러시아가 어떤 식으로든 개입됐다고 믿지 않는다"고 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