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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정의 ‘천억 비자금설’ 수사 유보, 대선 때 나를 살렸다”-김대중 육성 회고록〈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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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김대중 육성 회고록 〈21〉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에 올라탄 나, 김대중(DJ)의 대권 레이스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로웠다. 생애 네 번째 대권 도전이던 1997년 15대 대선 초반에는 그랬다.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한나라당 이회창-국민신당 이인제 후보의 3자 구도에서 선두를 달렸다. 나는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회창은 ‘3김 청산’을, 이인제는 ‘세대교체’를 외치며 경쟁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거대한 역풍이 몰아쳤다.

실체 없는 1000억원 비자금 폭로

김태정 검찰총장이 1997년 10월 21일 신한국당이 고발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15대 대선 후보 비자금 의혹의 수사를 선거 이후로 유보하겠다고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태정 검찰총장이 1997년 10월 21일 신한국당이 고발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15대 대선 후보 비자금 의혹의 수사를 선거 이후로 유보하겠다고 발표하고 있다. [중앙포토]

첫 번째는 비자금 의혹. 이회창 후보 측에서 나를 낙선시키기 위해 기획한 비열한 짓이었다.

이 후보의 신한국당(11월 21일 민주당과 합당 뒤 ‘한나라당’으로 개명)은 대선을 두 달 앞둔 10월 이른바 ‘김대중 비자금 의혹’이란 사건을 터뜨렸다.

내가 1000억원이 넘는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했다며 검찰에 뇌물 등 혐의로 고발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서 받은 20억원 외에 돈이 더 있다는 ‘20억+α(알파) 수수설’도 흘렸다.

이회창 전 총리가 후보로 선출된 뒤 지지율이 반등하지 않자 국면전환을 위해 벌인 흑색선전이었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돈에 팔촌의 계좌에 엄청난 돈이 은닉됐다고 떠벌렸다.

“그런 일 없다”고 부인했지만, 내 도덕성을 더럽히려는 의도로 거칠게 물고 늘어졌다. 여당이 흘리고 언론이 부풀려 보도하니 의혹은 사실처럼 둔갑해 삽시간에 눈덩이처럼 커졌다.

당할 수만은 없었다. 비자금 의혹에 대해 국정감사를 실시하자고 했다. 계좌를 모두 뒤져 규명하자고 반격했다.

정작 여당은 국정감사를 피했다. 실체 없는 의혹을 과장해 선거에만 써먹으려는 계산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선거가 끝나면 다 잊어버릴 테니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김태정 “근거 없이 어떻게 수사하나”

15대 대선 투표일을 사흘 앞둔 1997년 12월 15일 그룹 ‘코리아나’와 함께 거리 유세를 하고 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15대 대선 투표일을 사흘 앞둔 1997년 12월 15일 그룹 ‘코리아나’와 함께 거리 유세를 하고 있다. [사진 연세대 김대중도서관]

이회창 후보 측에서는 검찰에 수사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김태정 검찰총장이 검사장을 소집했더니 한 명인가 빼놓고 다 수사하자고 했다. 그러나 김 총장은 버텼다. 김 총장은 10월 21일 나에 대한 비자금 의혹 고발 사건을 대선 이후로 유보하기로 결단했다. 이유가 명확했다.

“이 사건을 수사할 경우 대선을 불과 2개월 앞둔 시점에서 극심한 국론 분열, 경제 회생의 어려움과 국가 전체의 대혼란이 분명하다고 보이고, 대통령 선거일 전에 완결하기도 불가능하다.”

김 총장이 수사를 결정했더라면 나는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매일같이 ‘검찰이 조사한다’ ‘압수수색한다’고 떠들고, 마치 뭔가 있는 듯 언론에 흘리면 “조작됐다”는 항변은 먹혀들지 않는 법이다.

여론재판에서 만신창이가 될 게 뻔했다. 그사이 선거는 끝나고 의혹 자체에 대한 관심은 증발해 버릴 것이다.

“법조인의 양심으로 수사에 착수할 수 없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어떻게 수사할 수 있겠는가”라는 게 김 총장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그 덕에 내가 죽지 않고 살았다.

색깔론에 북풍·총풍 동원

1997년 12월 18일 투표가 이뤄진 15대 대선 후보의 공식 포스터. [사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97년 12월 18일 투표가 이뤄진 15대 대선 후보의 공식 포스터. [사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두 번째 악재는 색깔론과 북풍(北風). 대선 때마다 나를 향해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골메뉴다.

언론들은 정부 당국자의 말을 인용, “97년 8월 천도교 교령(오익제)이 평양방송에 나와 월북 직전 국민회의 후보(DJ)와 통일 문제를 자주 거론해 왔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현세의 한울님”이라고 찬양했던 오익제가 사전에 나와 얘기하고 자진 월북했다는 근거 없는 내용까지 퍼뜨렸다. 한나라당이 일제히 공격에 가세했다.

총풍(銃風)도 동원했다. 여당 측 사람들이 중국 베이징에 가서 북한 대표를 만나 판문점에서 총격전을 일으켜주면 지원을 하겠다며 공작을 폈다.

71년, 87년, 92년 출마 때는 색깔론이 국민에게 먹혔다. 나는 색깔론 공격에 상심했다. 통일 운동을 하는 사람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싸웠다. 좌익으로 몰려 사형 언도까지 받았다. 97년 대선 때는 달랐다. 선거철만 되면 몰아치다 선거가 끝나면 홀연 사라지는 북풍 공작, 그 실체를 국민이 꿰뚫어 봤다. 하도 여러 번 하니 약발 없이 죽어버렸다.

“이인제,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 것”

세 번째 악재는 외환위기 사태. 김영삼(YS) 대통령은 집권 5년 동안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고 하나회를 숙청하는 등 업적을 남겼지만, 외화 부족으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굴욕을 초래했다.

나는 IMF 재협상을 주장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당시 IMF니 뭐니 잘 몰랐다. 미국 교포 출신 학자가 “IMF는 아르헨티나 등 어디나 얼마든지 재협상을 한다”고 조언했다. 잘못된 어드바이스인 줄도 모른 채 TV토론에서 IMF 재협상론을 폈다.

국가 차원에서 수락한 IMF 구제금융에 반대한 것처럼 비쳤다. 국가신인도가 폭락하고 금융시장이 출렁대며 국가부도 위기론이 대두했다. 이회창 후보는 내가 IMF 협상을 반대해 나라를 망친다고 맹렬히 비판했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판세가 상당히 불리한 지경까지 치달았다. 정부와 IMF 간 최종 합의문을 대선 후보들이 이행하겠다는 약속에 서명한 끝에 겨우 진정됐다.

또 다른 변수는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의 거취였다. 나는 그가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봤다. 야심 찬 성격에 배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대선 끝까지 완주한 덕분에 나로선 상대적인 이득을 얻었던 게 사실이다.

조순씨의 행보는 안타까웠다. 그는 내가 탈당한 민주당에 재입당해 총재직과 대선후보직을 받고 대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지지도가 한참 밑돌자 후보를 사퇴하고 이회창의 신한국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을 창당했다.

95년 그의 서울시장 당선에 내가 절대적인 도움을 준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지자 “내가 무슨 김대중씨의 도움을 받았느냐”고 했다. 점잖은 학자 출신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발언이었다.

내 모습을 본 것 같은 노무현

노무현·김원기·유인태·원혜영 등 독자 행동을 하던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인사들의 합류도 큰 힘이 됐다.

노무현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는 88년 YS의 통일민주당으로 정계에 입문했기에 나와 당이 달랐다. 별 접촉도 없었다. 그러다가 그가 서울에서 국회의원을 하다 부산에서 출마하는 용기를 보고 높이 평가했다.

편한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택하는 용기에서 나를 본 것 같았다. 대통령이 된 뒤 영호남 화합 차원에서 그를 해양수산부 장관에 임명했다. 장관 경력이 그의 대선 출마 때 도움이 됐다.

나는 12월 14일 밤 진행된 마지막 3차 TV토론에서 이렇게 국민에게 다가갔다.

“불행히도 저는 세 번이나 도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국민이 저를 이때 쓰시려고 뽑아주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위기의 강을 건너는 다리가 되겠습니다. 모든 분이 제 등을 타고 위기의 강을 건너십시오.”

마지막 유세는 선거 전날인 12월 17일 서울 명동에서 했다. ‘대통령 후보 김대중’ ‘정치인 김대중’으로서 내 인생의 마지막 유세였다.

“저에게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40년 동안 갈고닦은 지혜와 경륜이 있습니다. 저는 감옥에서도, 미국에서도 대통령이 될 준비를 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대통령이 될 준비를 저만큼 한 사람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선거 통한 ‘민심 혁명’

12월 18일, 15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출구조사를 보고 이기겠구나 생각했지만 안심은 안 됐다. 개표를 다 보지 않고 잠자리에 들었다. 1032만 표(40.27%)를 얻어 993만 표(38.74%)의 이회창 후보를 이겼다고 알려줘서 깨어났다. 평생 전력을 다해 나를 도운 집사람(이희호 여사)과 기쁨의 포옹을 했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손에 의해 여야 간의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국민이 금권, 권력, 모략, 용공 조작에 넘어가지 않고 나를 지켜줬다. 선거를 통한 민심 혁명이 성공을 거뒀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 일생 그렇게 바라던 대통령이 됐다. 내가 소원하던 정책을 실천하겠다. 헛되게 내 인생을 마치지 않겠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 QR

김대중 육성 회고록 QR

이튿날 새벽 일산 집 앞에 모인 지지자들은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 ‘목포의 눈물’을 불렀다. 그리고 연호했다.

“대통령, 김대중!”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 중인 ‘김대중 육성 회고록’ 전문(http://joongang.co.kr/article/25186776 )은 QR코드를 스캔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22회 〈가혹했던 외환위기 극복〉이 이어집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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