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 안 해요?”
허름한 수산물창고 마약 밀거래 현장에서 서툰 한국말로 재촉하는 중국 여인. 5일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공개된 영화 ‘녹야’(감독 한슈아이)의 주인공 진샤다. 홍콩·중국 국적 영화지만, 대사의 90% 이상이 한국말, 촬영도 서울 안팎에서 했다.
인천항 출입국 검색대 직원이란 설정의 진샤 역은 중국 톱배우 판빙빙(42)이 맡았다. 한국 배우 이주영이 화교 애인을 둔 마약 운반책 ‘초록머리’ 여자 역을 맡아, 한국인 남편의 폭력과 성폭행에 시달리던 진샤의 탈출을 거든다.
중국 드라마 ‘황제의 딸’(1998)로 스타덤에 오른 후 지난해 할리우드 첩보영화 ‘355’까지 외향적이고 당당한 역할을 도맡던 판빙빙이 180도 변신했다. 영주권을 얻기 위한 3500만원이 없어 남편에게 매여 사는 진샤의 핏기 없는 얼굴에서 한때 전 세계 고소득 여성 배우 4위(2015, 포브스)에 오르며 칸 국제영화제 심사위원(2017) 등 레드카펫을 누빈 판빙빙의 화려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톱스타 판빙빙 부산영화제 내한 #한국서 찍은 한국말 영화 '녹야' #잠적설 딛고 女연대 작품 선보여 #"약 7년만의 내한, 초청 기뻐"
한국어·동성애 연기 도전한 판빙빙
‘녹야’는 그가 절친한 사이인 한슈아이 감독과 의기투합한 주연 복귀작이다. 판빙빙은 2018년 중국 정부의 탈세자 블랙리스트에 오르며 ‘실종설’이 돌 만큼 오랜 잠적 끝에 복귀했다. 자국 활동은 현재로선 거의 멈춘 상태다.
연기에 대한 간절함 때문일까. ‘녹야’에서 판빙빙은 첫 한국말 대사, 동성애 연기까지 도전했다. 상대역 이주영도 그가 직접 손편지를 써 캐스팅했다.
5일 ‘녹야’ 기자시사 후 간담회에 참석한 판빙빙은 먼저 “연기자는 침착하게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쉬는 동안 영화 많이 보고 새로운 인물들과 교류했다. 색다른 경험을 통해 제 인생을 조금 더 축적했다”고 공백기를 해명했다. ‘녹야’에 대해 “두 여성이 서로를 구하는 역할이라는 게 감동적이고 끌렸다. 몇 년 간 내 개인적 사건, 스토리와 여기 있는 역할들이 잘 매치됐다”면서 “26년간 다양한 역할을 통해 성장해왔는데, 이 원시적 인물 진샤를 해석해 보고픈 충동을 느꼈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여성들아, 두려워 말라’가 이 영화의 주제였다”고 출연 계기를 밝혔다.
감독 "판빙빙과 산둥 출신이라 한국 친숙"
각본을 겸한 한슈아이 감독은 데뷔작 ‘희미한 여름’으로 2020년 부산영화제 피프레시상을 받고, 이 두 번째 장편으로 올 초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됐다. 그는 “빙빙이나 저나 (한반도와 가까운) 산둥 출신이고 한국이 친숙해서 한국에서 영화를 찍기로 했다”면서 “빙빙은 이전에 하고 싶은 말 다하는 생명력 강한 역할이 많았기에 이번 연기가 큰 도전이었다. 내면 연기를 위해 많이 노력했다”고 전했다.
이주영은 한슈아이 감독이 한국 독립영화 ‘야구소녀’(2019)에서 그의 솔직한 웃음에 반하며 합류했다. 판빙빙은 “주영씨와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걸 알게 된 뒤 여배우로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농담하며 “주영씨의 귀여우면서 진정성 있는 모습이 우리 영화에 불꽃을 일으킬 거라 생각해 손편지를 쓴 '달달한' 사정이 있다”고 했다. 이날도 “사랑해” “워 아이 니(我愛你)” “중국에 놀러오라” 등 한국말과 중국말을 섞어가며 이주영에게 애정 공세를 펼쳤다.
판빙빙 이주영에 "워 아이 니" 애정공세
언어를 뛰어넘은 여성 연대가 ‘녹야’의 중심이다 . 한슈아이 감독은 “보이지 않는 사회망을 장악한 남성들이 두 여성을 침몰시키려 하는 상황을 극중 수어에도 담았다”고 소개했다. 한국 영화와 다른 시선에서 담은 풍경을 보는 재미도 있다. 다만, 한국말 대사에 어색한 번역투가 종종 있고, 진샤의 남편 등 일부 캐릭터의 변화에 설득되지 않는 감정적 공백이 큰 것은 이 영화의 약점이다.
판빙빙은 “코로나19 팬데믹이 극심하던 시기 섭외한 배우가 발병하는 등 어려움 속에서 촬영했다”면서 “여성으로 이뤄진 제작진이 똘똘 뭉쳐 극복했다”고 했다. “어쩌면 여성만이 여성을 진정으로 돕고 이해하고 잘 알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봤다”면서다.
판빙빙이 한국 작품에 출연한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전쟁영화 ‘마이웨이’(2011)의 전사 쉬라이 역, JTBC 드라마 ‘인사이더’(2022)의 삼합회 관계자 역할에 이어서다. 이주영은 ‘녹야’ 역시 한‧중 합작 의미가 크다고 짚었다. “한국과 중국이 한국 로케이션으로 합작할 수 있다는 의미가 크다. 스태프도 한국과 중국 반반이었다”면서 “합작이 더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출연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