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현역 감독 정지영…한국사의 산증인이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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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영 감독은 ‘하얀전쟁’‘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 수상 경력이 많음에도 아직 최고의 영화를 만들지 못했노라 고백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980년대엔 한국영화가 수준 떨어진다고 우습게 여겼어요. 요즘은 할리우드보다 더 재밌다는 관객이 있잖아요. 검열이 없어지고 시대가 바뀌며 생긴 엄청난 변화죠. 제약하지 않고 마음껏 상상하게 두니까, 국제적 관심까지 얻게 됐죠.”

데뷔 40주년을 맞은 정지영(77) 감독은 한국영화의 최근 글로벌 인기 요인을 자유로운 창작 환경에서 찾았다. 그는 1980년대부터 지금껏 상업영화 시장에서 활동해온 거의 유일한 현역 감독이다. 40주년 기념 회고전이 지난달 서울에 이어 오는 18일 개막하는 영국 런던아시아영화제에서 열린다. 지난달 21일 서울 상암동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영화에 데모 장면도 찍을 수 없었던” 유신정권 시절 김수용 감독 연출부로 충무로에 입성했고, 치정 스릴러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3)로 감독 데뷔했다. 1990년대 이념을 넘어선 전쟁 대작으로 해외에서도 주목받았다. 빨치산을 다룬 ‘남부군’(1990)이 대표작이다. 베트남전 상흔을 현지 올로케로 새긴 ‘하얀 전쟁’(1992)으로 도쿄국제영화제 그랑프리·감독상을 받았다.

시대 참여적 주제의식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대학교수의 석궁 테러 실화를 법정 드라마로 옮긴 ‘부러진 화살’(2011), 론스타 게이트를 다룬 ‘블랙머니’(2019) 등이다. ‘직지코드’(2017), ‘천안함프로젝트’(2013) 등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참여했다. 다음달 1일에는 강도 살해범으로 몰린 청년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실화를 극화한 17번째 극영화 연출작 ‘소년들’이 개봉한다. 그는 “정지영의 욕구는 사회 문제나 우리의 삶을 한 개인이 아닌, 환경·사회·정치가 어우러진 형태로 다루는 것이다. 사랑의 관념조차 옛날과 다르지 않으냐”며 “다만 관객한테 외면받는 영화는 원치 않는다. 내가 아티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일문일답.

첫 회고전 소감은.

“작년 배창호 감독 데뷔 40주년 특별전 자리에서 처음 얘기가 나왔을 땐 ‘내가 회고전을?’ 그랬다. 은퇴 후에 하는 건데, 현역이니까. 쑥스럽기도 하다.”

회고전에 초기작이 많지 않은데.(회고전에선 ‘남부군’‘하얀전쟁’‘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부러진 화살’‘남영동 1985’ (2012), ‘블랙머니’ 등 8편이 상영된다.)

“디지털화가 안 돼 포함시키지 못했다. ‘남부군’ 전후의 변화를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직접 각본을 쓴 초기 멜로에도 사회적 화두를 녹였다.

“‘거리의 악사’(1987)에 운동권 학생, 재개발 문제를 담았다. 검열을 피해 썼는데도 10분가량 잘렸다. ‘추억의 빛’(1984)은 70~80년대 데모에 휘둘리지 않는 젊은이들의 방황을 그렸다. 거리에 나서지 않는 사람들의 삶에도 정치는 분명 영향을 미친다.”

정 감독은 학창 시절 문학을 통해 사회와 세계를 보는 눈을 단련했다고 했다. 단편소설 ‘오발탄’을 유현목 감독의 영화로 다시 본 뒤 영화 연출에 뜻을 품게 됐다. 필모그래피의 전환점은 시대적 금기에 도전한 ‘남부군’이다. 평균 제작비 2억원이던 시절, 14억원을 투입했다. 실패하면 영화판을 떠야 하는 상황에서 서울 관객 37만이 그를 살렸다. ‘장군의 아들’에 이어 그해 흥행 2위였다. ‘하얀전쟁’은 베트남전의 본질을 과감히 물으며 서울 15만 관객을 동원했다. ‘까’(1998) 이후 13년이나 벌어진 공백은 ‘부러진 화살’로 뛰어넘었다. 전국 342만 관객을 동원했다. 그는 “민주화 운동부터 스크린쿼터·영화법 개정 등 한국영화계 이슈의 중심에서 리더 역할을 했던”(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 행동파였다. 88년, 할리우드 직배사와 스크린쿼터 폐지에 반대해 미국 배급사 UPI 영화 ‘위험한 정사’ 상영 극장에 뱀을 푼 일로도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