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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앞마당' 아르메니아의 반기…‘푸틴 체포’ ICC 가입

중앙일보

입력

옛 소련 국가인 아르메니아 의회가 3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체포 영장을 발부한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가입하기로 했다. 러시아의 전통적 우방국인 아르메니아가 반기를 든 모양새다. 최근 아제르바이잔과의 분쟁에서 러시아가 방관적인 태도를 보이자 불만을 나타낸 것이라는 풀이가 나온다.

아르메니아 의원들이 수도 예레반에서 열린 아르메니아 공화국 국회 회의에 참석해 ICC 로마 규정 비준안 통과를 논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아르메니아 의원들이 수도 예레반에서 열린 아르메니아 공화국 국회 회의에 참석해 ICC 로마 규정 비준안 통과를 논의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의회는 이날 찬성 60표, 반대 22표로 ICC 로마규정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로마규정을 비준한 국가는 ICC의 사법관할권에 속한다. 해당 안건은 아르메니아 대통령이 서명한 뒤 유엔 사무총장에게 제출하는 절차가 끝나면 비준일 기준 60일 후에 발효될 예정이다.

아르메니아 의회의 ICC 가입 결정에 러시아는 즉각 반발했다. 비준안이 발효되면 아르메니아는 푸틴 대통령이 입국했을 때 그를 체포할 의무가 생긴다. ICC는 지난 3월 우크라이나 전쟁 범죄 혐의로 푸틴 대통령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했고 ICC 가입국은 이에 협조해야 한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러시아 크렘린궁 대변인은 “아르메니아는 우리의 동맹이자 우방국”이라며 “양국 관계의 관점에서 (아르메니아의 ICC 가입은) 잘못된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푸틴 대통령은 어떤 이유로든 아르메니아 방문을 포기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옛 소련에 속해있던 아르메니아는 현재 러시아의 주요 동맹국 중 하나다. 아르메니아는 옛 소련권에 속해있던 러시아·벨라루스·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 등 6개국이 모여 만든 군사동맹인 집단안전보장조약기구(CSTO)에 가입돼 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하지만 지난달 19~20일 아제르바이잔이 ‘대테러 작전’을 명분으로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지역인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규모 공습을 감행했음에도 러시아가 군사 개입을 주저하면서 양국 관계는 틀어졌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국제적으로 아제르바이잔 영토지만 주민의 대다수는 아르메니아계여서 30년 넘게 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1991년부터 아르메니아계 분리주의 세력은 아르차흐 공화국을 세운 뒤 군대를 운영하며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하루 만에 아르차흐 공화국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사태는 끝나지 않았다. 아제르바이잔 측 점령군에 위협을 느낀 약 10만 명의 아르메니아계 주민이 피난길에 올랐고, 여전히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아르메니아로 향하는 모습. AFP=연합뉴스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아르메니아로 향하는 모습. AFP=연합뉴스

아르메니아는 러시아가 자신들을 보호하지 않아 사실상 아제르바이잔의 손을 들어줬다고 여긴다. 니콜 파시냔 아르메니아 총리는 지난달 24일 이 지역에 러시아가 평화유지군을 파견해 두고 있으면서도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이 지역엔 러시아의 평화유지군 약 2000명이 주둔하고 있다. 파시냔 총리는 러시아와 집단안전보장조약기구에 “깊이 실망했다”고 말하면서 탈퇴 의사까지 밝혔다.

실제로 아르메니아에선 반(反) 러시아 정서가 커졌다. 아르차흐 공화국의 항복 이후 아르메니아 수도 예레반의 러시아 대사관 밖에선 “러시아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외치는 시위가 벌어졌다.

‘러시아의 앞마당’이라 불렸던 우방국 아르메니아가 반기를 들자 전쟁 중인 러시아가 주변국에 영향력을 잃고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는 오랫동안 분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주변국들에 대한 주도권을 잃고 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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