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러시아 앞마당서 ‘무력 충돌’ 아제르ㆍ아르메니아, 휴전 합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러시아의 앞마당’이자 ‘캅카스의 화약고’라 불리는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에 대규모 무력 충돌이 벌어진지 하루 만에 양측이 휴전 수순에 접어 들었다.

러시아 인테르팍스 통신에 따르면 20일(현지시간) 현지에 주둔 중인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중재에 따라 아르메니아 자치 세력이 무장해제에 동의했다. 로이터통신도 “지역 내 아르메니아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이곳의 미래에 관한 당국 간 논의가 진행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앞서 이 지역을 둘러싸고 오랜 기간 영토 분쟁을 벌여온 아제르바이잔이 전날 아르메니아를 상대로 대포·미사일·드론을 동원해 공격했고, 어린이를 포함해 민간인 사상자가 다수 발생했다. 이번 사태가 전면전으로 치달을 경우 유럽에 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은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19일(현지시간) 아제르바이잔 국방부가 공개한 영상 캡처. 이날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위치한 아르메니아의 군사시설 등을 타격했다며 "반테러 작전 개시"을 선언했다. AFP=연합뉴스

19일(현지시간) 아제르바이잔 국방부가 공개한 영상 캡처. 이날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위치한 아르메니아의 군사시설 등을 타격했다며 "반테러 작전 개시"을 선언했다. AFP=연합뉴스

AP통신·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 국방부가 19일 성명을 통해 “나고르노-카라바흐에 포격을 가하며 ‘반(反) 테러 작전’을 시작했다”며 “아르메니아 군대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분리주의 정부가 항복할 때까지 작전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아르메니아 정부는 “이번 공습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민간인에 대한 아제르바이잔의 전면적 공격”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나고르노-카라바흐 주민들이 소셜미디어에 게시한 영상에는 공습 사이렌과 함께 이 지역 최대 도시 스테파나케르트가 폭격당하는 모습 등이 담겼다. 아제르바이잔을 상징하는 ‘A’자가 거꾸로 칠해진 군 차량 모습도 담겼다. 이를 두고 폴리티코는 “지난해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러시아 차량의 ‘Z’ 문양을 떠올리게 한다”고 전했다.

이날 아제르바이잔 국방부는 “아르메니아 군대의 전투 자산과 군사 시설 등만 정밀하게 무력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AFP 통신 등에 따르면 이날 공격으로 민간인 27명이 사망했으며 200명 이상이 다쳤다. 또 16개 마을에서 7000명 이상이 대피했다.

러시아 국영 리아노보스티통신은 아제르바이잔 국방부가 파괴했다는 아르메니아 측 자치군 레이더 기지 인근에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임시 주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르메니아 북서부 귬리 일대엔 러시아의 평화유지군 3000여명 이상이 주둔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19일(현지시간)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최대 도시인 스테프나케르트의 민간인 거주 지역의 건물과 차량이 파손된 모습. EPA=연합뉴스

19일(현지시간)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최대 도시인 스테프나케르트의 민간인 거주 지역의 건물과 차량이 파손된 모습. EPA=연합뉴스

"러, 이 지역 분쟁 막을 장악력 상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구소련 국가로,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인 캅카스 산맥 남쪽에서 국경을 접하고 있다. 무력 충돌이 벌어진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양국 국경 사이에 있는 자치 공화국으로 1998년 분리독립을 선언했다. 국제법상 아제르바이잔 영토로 인정되지만, 주민 12만 명 대다수가 아르메니아인이라 아르메니아군이 주둔하며 실효 지배 중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인구의 95%가 무슬림이지만, 아르메니아인으로 구성된 나고르노-카라바흐 주민 대다수는 기독교 신자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정부는 수년간 아르메니아와 통합하려 하고 있으나 아제르바이잔의 거부로 실패해왔다.

양국은 이 지역에서 크고 작은 충돌을 이어왔다. 지난 2020년 6주간의 전면전 끝에 아제르바이잔이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면서 이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의 고립이 심화됐다. 당시 러시아가 중개한 휴전 협정의 일환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인 ‘라친 회랑’을 통해 주민을 위한 식량·의약품이 공급됐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그러나 최근 아제르바이잔 측이 회랑을 봉쇄하면서 주민들이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등 위기가 심화됐다. 국제형사재판소(ICC)의 전 수석검사 루이스 모레노 오캄포는 아제르바이잔의 회랑 봉쇄에 대해 “현재 진행 중인 대량 학살”이라고 비난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러시아 앞마당’의 권력 역학 변화를 보여준 사건이라고 평했다. 국제위기그룹(ICG)의 러시아 담당 애널리스트인 올렉 이그나토프는 “아제르바이잔의 공격은 남캅카스의 상황에 대한 러시아가 지역 분쟁을 막을 능력을 상실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간 아제르바이잔은 튀르키예의 지원을 받았고, 아르메니아는 러시아를 파트너로 삼아 세력 균형을 이뤘다. 그러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이 묶이자 아제르바이잔은 “영토 내 ‘회색지대’를 없애겠다”고 나선 것이다.

러시아의 영향력이 줄자, 아르메니아는 미국과 서방에 손을 내밀고 있다. 이달 초 아르메니아는 수도 예레반 외곽에서 열흘 동안 자국군과 미군, 유럽 및 아프리카 사령부 소속 군인 간 합동 군사훈련을 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최대 도시 스테파나케르트에서 포격이 발생하자 대피소로 대피한 주민들. AP=연합뉴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최대 도시 스테파나케르트에서 포격이 발생하자 대피소로 대피한 주민들. AP=연합뉴스

美, 24시간 내 외교 개입 가능성

국제사회는 양국에 “무력 충돌을 중단하고 대화를 재개하라”고 촉구했다. 호세프 보렐 유럽연합(EU)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이날 성명에서 “군사 활동을 중단할 것을 촉구한다”며 “평화와 (관계) 정상화 대화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면 폭력을 멈춰야 한다”고 아제르바이잔을 규탄했다.

미국 국무부의 고위 관계자는 AFP에 “앞으로 24시간 동안 토니 블링컨 장관이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긴장 문제를 놓고 외교적으로 관여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또 다른 국무부 관계자도 “이번 사안은 심각하고 위험했기 때문에 미국은 모든 당사자와 접촉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국무부 브리핑에 참석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AP=연합뉴스

미국 국무부 브리핑에 참석한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AP=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분쟁 해결을 위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를 소집해야 한다고 밝혔다. 독일 정부 역시 아제르바이잔이 군사적 행동에 의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