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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폭 먹이사슬」 끊자/송진혁(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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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수감된 폭력배 두목들이 구치소안에서 회합을 갖고 자기들의 형량을 낮추기 위해 검사들을 협박한다는 것이다.
명색 정부가 있는 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쫓았다는 말은 들었어도 수감된 폭력배가 검사를 협박했다니 이것이 현실인가,소설인가. 도대체 우리사회가 어찌됐기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한마디로 우리는 오늘날 기막힌 시대에 살고 있다. 애 학교 보내기 겁나고 밤외출이 불안하고 택시타기가 꺼림칙한 단계를 훨씬 넘어 이러다간 이제 평범한 시민의 일상적 생활이 유지될까 하는 의구심마저 안가질 수 없게 됐다.
범죄,범죄 하지만 이 시대에 우리가 겪고 있는 범죄는 어느 시대,어느 사회에나 있게 마련인 그런 상식적인 범죄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음이 분명하다.
단순히 범죄가 들끓고 깡패가 날뛴다는 차원이 아니다. 최근 몇년사이 급격히 증가한 성범죄·인신매매·강도·절도 등이라면 그런대로 각자 몸조심·집단속하면서 견딜 수도 있는 일이다. 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사회가 타락하다 보니 부분적·일시적으로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겠거니 하는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조직폭력배와 얽혀 홍수처럼 터져나오고 있는 이른바 「권­폭 유착」의 사례들을 보면 오늘의 범죄양상은 결코 견딜만한 것도,일시적·부분적인 현상도 아닌 것이 명백해졌다.
법을 만들고 지키고 집행하는 국회의원,경찰,판·검사,교도소의 교도관이 폭력배와의 연계에서 표를 모으고 돈을 챙기고 술을 함께 즐기고 심부름을 해주는 것이 관행화·구조화된 것이 아닌가.
검사가 폭력배의 전과를 빠뜨리고 국회의원이 석방운동을 한 인천사건,사기꾼과 국회의원이 얽힌 수원사건,판·검사,국회의원,보안대간부가 폭력배와 술자리를 함께 한 대전사건,이 3대사건은 정치와 권력과 범죄의 유착을 더 변명할 수 없게 보여주었고 구치소안에서 폭력배들이 검사를 위협한다는 것은 그 수위가 이미 코밑까지 찰랑찰랑 차올랐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런 대담성·당돌성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한때 국회에서까지 논란된 『민나 도로보』(모두 도둑놈)란 TV드라마의 유행어가 있었는데 이런 「민나 도로보」 의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한지 오래다.
『너는 안해먹느냐』『당신은 내 신세를 안졌느냐』는 볼멘 항변이 범죄꾼들의 의식에 도사리고 있음이 틀림없고 그들의 그런 의식이 있는 한 법복의 권위도,공권력의 효율도 나오긴 틀린 것이다.
권­폭 유착은 서로 물고 물리고 의지하고 신세지는 일종의 먹이사슬이 형성된 것이며 이런 판에서는 누가 암까마귀고 누가 수까마귀인지 모를 지경이 되고 만다. 이런 사건들을 보고 누가 문제된 몇몇의원과 검사아닌 다른 의원과 검사들은 다 깨끗하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모두가 도둑』이라는 확신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 누가 누구를 벌주고 문책하며 교도할 수 있겠는가. 그런 벌과 문책과 교도를 사람들이 납득하고 권위를 인정해 줄 수 있겠는가.
이처럼 「권­폭 유착」은 나라의 사법·사정기능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것이며,이대로 나가다가는 대통령이 공약한 치안의 확립은 커녕 우리사회가 이러고도 지탱할 수 있겠는가 하는 걱정을 안할 수 없게 한다.
이런 일은 결코 보통일이 아니다. 그냥 「사회사건」이 아니다. 수출이 좀 덜 되거나 북방외교가 좀 늦어지거나 하는 차원의 문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중대하고 심각한 문제다. 한시바삐 특단의 대책이 나와야 한다. 문제가 심각하고 중대한 그만큼 대책도 심각하고 결연한 것이 되지않으면 안된다.
오늘의 이런 범죄나 부패를 6공정부가 다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지난 수십년간에 벌어진 정통성없는 집권과 정당성없는 권력운용,특혜·투기·탈세·이권 등에 의한 일부계층의 정당성없는 축재과정과 부의 독과점등 정치·경제·사회의 각 분야에서 누적된 모순이 근본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6공정부로서는 스스로의 무능에서도 원인을 찾아야하고 이제와서 범죄는 우리 체제와 정권자체의 안위와도 관계된다는 점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가령 정부고 국회고 사법부고 다 썩었으니 모조리 물러가라고 운동권이 외친다면 무슨 논리로 그런 목소리를 제압하겠는가. 또 깡패를소탕한 5·16이나 5·17 당시가 더 좋았다는 불안한 서민의 소박한 정서를 무슨 말로 설득할 것인가.
준비도 없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던 안이한 자세를 버리고 지금 정부가 화급히 할일은 자체내부의 과감한 대숙정일 수 밖에 없다.
범죄와 연계됐거나 연계됐을 개연성이 있는 각급 공직자는 검·경·일반관청·당·국회 할것 없이 정리하고 인사조치 해야 한다. 깡패를 봐준 사람을 그 위에서 봐주는 식으로 계열화돼있는 공직구조가 아닌가.
다음으로 유착고리가 없는 것으로 믿어지는 새로운 강력한 수사·사정팀을 편성하는 일이다.
새 팀에 의한 공정한 처리의 실적을 쌓아가야 실추된 공권력도 서서히 회복될 수 있다. 유착혐의가 있는 사람들로서는 아무리 용을 써봐야 일도 안되고 의혹을 씻기도 어렵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일은 범죄의 근본원인에 해당되는 우리사회의 기본적인 문제들­부의 편재·분배의 문제점,사회의 비민주성 등을 해소해나가는 각종 민주화 개혁의 지속적 추진이다.
형편이 어려워 개혁을 머뭇거리다가 형편은 더욱 나빠지고 개혁은 더 하기가 어려워진 것이 6공 3년이 아닌가.
이제 임기 2년을 남기고 다시 한번 새 출발의 각오로 숙정과 개혁의 깃발을 들어야 한다. 다른 어떤 현란한 구호나 무지개빛 앞날의 약속도 이젠 다 듣기도 싫다.
범죄로부터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이 한가지 일만이라도 믿음성있게 추진하길 당부하고 있다.<편집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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