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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바쳐 죄 씻어라" 되레 참전 부추긴 러 종교 수장의 정체

중앙일보

입력

키릴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옹호하는 발언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국제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AP=연합뉴스

키릴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옹호하는 발언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국제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AP=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설득해 전쟁을 멈출 것으로 기대됐던 인물이 있다. 키릴(77·본명 블라디미르 군다예프)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다. 개신교·가톨릭과 함께 기독교 3대 분파인 동방정교회의 최대 교파 수장이자, 푸틴이 따르는 영적 뒷배로 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우크라이나 침공을 '성전(聖戰)'에 빗대며 양국 간 갈등을 심화하며 국제사회의 비판 대상으로 전락했다. 지난 14일(현지시간) 포린어페어는 "키릴 총대주교가 크렘린의 군사적 목표를 위한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키릴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이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지난해 5월엔 "전쟁은 육신을 떠나 영적인 투쟁으로 들어섰다"며 성전을 암시했고, 지난해 9월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죄를 씻는 희생"이라며 참전을 종용했다. 최근엔 크렘린궁 인사들과 함께 푸틴의 각종 일정에 동행하며 영향력을 과시했다.

키릴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왼쪽)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모습.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5월 키릴에게 "푸틴의 복사 노릇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AP=연합뉴스

키릴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왼쪽)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모습.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5월 키릴에게 "푸틴의 복사 노릇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AP=연합뉴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키릴이 러시아정교회를 국영 기업처럼 푸틴 체제의 일부로 만들며 정권에 도덕적 정당성을 보장해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WSJ에 따르면, 러시아 내 정교회 신도 수는 인구의 63%를 차지하는데, 이들에게 전쟁을 옹호하는 여론을 설파하고 있다는 취지다. 지난해 5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키릴에게 "푸틴의 복사(服事ㆍ사제의 미사 집전을 돕는 역할) 노릇을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키릴이 지휘하는 정교회의 친(親)푸틴적 행보는 러시아 역사와 관련이 깊다. 1917년 10월 혁명 뒤, 러시아정교회는 무신론을 표방하는 볼셰비키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일부 사제들은 수용소에 끌려가거나 처형당했고 해외에 망명한 러시아인들이 따로 정교회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41년 독일군이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 키이우 전투를 벌이며 소련군을 와해시키자,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정교회를 옹호했다. 국민을 대독(對獨) 저항에 동원하기 위해선 종교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키릴 총대주교(흰 모자)는 푸틴 정권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대통령 일정에 동행하며 영향력을 과시한다. AP=연합뉴스

키릴 총대주교(흰 모자)는 푸틴 정권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대통령 일정에 동행하며 영향력을 과시한다. AP=연합뉴스

이후 정교회는 국가와 운명을 함께 하며 세력을 키웠다. 스탈린을 '신이 선택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군대를 조성할 기금도 보탰다. 소련 붕괴 뒤엔 정교회가 국민의 허탈감을 메워주는 역할을 했다. 이후 꾸려진 공산 정권에선 오랫동안 국교(國敎)로서의 혜택을 보기도 했다. 소련 해체 이후 첫 정교회 수장으로 등극해 현재까지 자리를 지키는 키릴이 정권과 밀착해온 이유다. 뉴욕타임스(NYT)는 "푸틴 집권 뒤부턴 정교회가 외교·안보 전략의 일부에까지 침투했다"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의 정교회도 이에 맞서 러시아와 종교적 분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WSJ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정부는 전쟁 발발 뒤 모스크바 총교구 소속 고위 성직자를 비롯해 러시아정교회 인사 60여 명을 재판에 넘겼다. 이들 중 일부는 러시아 선전, 우크라이나 군 정보 염탐 등의 혐의다. 지난 7월엔 예수의 탄생일을 1월 7일에서 서구와 같은 12월 25일로 옮겼다. 영국 BBC는 "러시아의 유산을 버리고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결과"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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