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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 없나"…러 신화 쓴 푸틴 '유령작가'의 기이한 역사왜곡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7일 블라디미르 메딘스키(53) 러시아 대통령 보좌관이 기자회견에서 새 역사 교과서를 설명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달 7일 블라디미르 메딘스키(53) 러시아 대통령 보좌관이 기자회견에서 새 역사 교과서를 설명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에 집착할 때, 통치 기반이 되는 이념·역사적 토대를 구축해준 인물.

블라디미르 메딘스키(53) 러시아 대통령 보좌관에 대해 19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가 이같이 표현했다. 메딘스키는 이달 초 러시아 정부가 배포한 새 역사 교과서의 집필을 총괄한 인물이다. 새 교과서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포함해 여러 부분에서 왜곡된 사실을 실어 논란이 됐다. NYT는 메딘스키의 일대기를 톺으며 "그가 어떻게 푸틴의 왜곡된 역사관 배후에 설 수 있었는지"를 조명했다.

지난달 메딘스키는 새 역사 교과서 발간을 공식화하며 "5개월도 채 되지 않는 기간에 편찬됐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국가의 관점을 잘 제시한 책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곧 국제 사회에선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가령 책은 우크라이나에 침공에 대해 "우크라이나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에 가입하려 했기 때문에 특별군사작전을 벌인 것"이라며 "만약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한 뒤에 크리미아 반도나 돈바스에서 분쟁이 벌어졌다면 (러시아의) 문명이 종말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새 역사 교과서에 실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사진. 교과서에는 2014년 크리미아 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왜곡된 사실이 실렸다. AFP=연합뉴스

새 역사 교과서에 실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사진. 교과서에는 2014년 크리미아 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왜곡된 사실이 실렸다. AFP=연합뉴스

이외에 2014년 러시아의 크리미아 반도 강제 합병을 '평화적으로 역사적 정의를 회복한 것'이라고 정당화하거나, 러시아를 서방 침략의 희생자로 묘사하며 "서방은 러시아 내부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데 집착한다"고 썼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부터 최근까지의 역사를 다루는 새 교과서는, 이달 1일부터 고등학교 10학년(16세)~11학년(17세)의 수업에 활용됐다.

NYT는 메딘스키가 새 역사 교과서 집필을 지휘할 적임자였다고 소개했다. 푸틴이 집권 초부터 중시했던 프로파간다(선동·선전)에 특화된 홍보맨 출신이라는 취지다. 소련군이었던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한 그는, 러시아 내 최고 엘리트 양성 기관으로 꼽히는 모스크바 국립 국제관계대에서 저널리즘과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다. 졸업 뒤엔 광고 회사를 세워 담배 회사나 카지노 등의 홍보를 맡으며 이름을 알렸다. 출중한 능력으로 유명해진 그는, 게오르기 부스 전 칼리닌그라드 주지사의 보좌관으로 일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세 번째) 대통령을 보좌하는 메딘스키(왼쪽 두 번째) 보좌관의 모습. EPA=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왼쪽 세 번째) 대통령을 보좌하는 메딘스키(왼쪽 두 번째) 보좌관의 모습. EPA=연합뉴스

또 메딘스키는 역사에 관심이 깊었다. 2007년부터 『러시아에 관한 신화』라는 역사 시리즈를 펴냈는데, 그는 책에서 러시아 역사의 어두운 면은 모두 적국의 비방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NYT는 "책을 통해 러시아는 자비롭고 강력하며 약소국에 항상 정당하게 승리하는 나라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다"고 평가했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그의 책을 "기이한 오류로 가득 찬 선전 팸플릿"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메딘스키는 이에 대해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은 해석에서 시작된다"고 반박했다. 그는 저서에 "만약 고국과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이야기라면, 항상 긍정적인 것"이라고 쓰기도 했다. 각종 논란에도 메딘스키는 2012~2020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내각에서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다.

지난해 러시아 군 역사 학회 관련 기념 행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는 메딘스키(가운데) 보좌관. 왼쪽은 세르게이 나리쉬킨 해외정보국장, 오른쪽은 키릴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다. AP=연합뉴스

지난해 러시아 군 역사 학회 관련 기념 행사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는 메딘스키(가운데) 보좌관. 왼쪽은 세르게이 나리쉬킨 해외정보국장, 오른쪽은 키릴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다. AP=연합뉴스

'애국 엘리트'를 자처한 그의 왜곡된 역사관은 푸틴의 눈에 띄었다. NYT에 따르면, 지난 2020년 여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자가격리 중이던 푸틴은 그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당시 푸틴은 자신의 통치를 지탱할 새로운 역사 기록물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기 생각을 가다듬고 적절하게 표현해줄 조력자가 필요했는데, 메딘스키가 적임이었던 것이다. 그가 새 역사 교과서 집필을 지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메딘스키는 푸틴의 각종 연설문 등도 대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수하에 있는 많은 보좌관이 쓴 초고를 최종 편집한다. 이런 연유로 NYT는 그를 “푸틴의 고스트 라이터(유령작가)”라고 칭했다.

NYT는 "성공 가도를 달리는 그가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무덤을 파고 있다"며 "수치심이나 두려움 없이는 러시아의 역사에 대해 논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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