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모든 교전 당사국은 전쟁으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이 시기의 미국 정치인들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안보와 무관하다고 선언했던 멀리 떨어진 나라에 군을 파병함으로써 보여준 비전으로 기억될 자격이 있다."
최근 한국어로 출간된 저서 『외교』(Diplomacy)에서 미국 현실주의 외교의 거장 헨리 키신저는 '한국은 미국의 방어선 밖에 있다'던 미국의 기존 입장을 뒤집은 해리 S.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의 참전 결정을 "한국 문제에 대해 확고히 맞서기로 한 용기"로 평가했다.
이런 '비전'과 '용기'를 바탕으로 함께 피흘린 한·미 동맹이 올해로 70년을 맞았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온국민의 땀으로 다시 일군 지금의 대한민국은 침략당한 피해국이 아니라 책임있는 평화 수호국으로 국제무대에 다시 섰고,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생물체와도 같은 동맹은 7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방향으로 진화했다.
올해로 창간 58주년을 맞은 중앙일보는 동맹의 기반인 한·미 상호 방위조약 체결일(1953년 10월 1일)을 앞두고 국민과 함께 과거 70년을 돌아보고, 미래 70년을 내다보기 위해 동아시아연구원(EAI)과 여론 조사를 실시했다. 8월25일~9월13일 사이 전국의 18세 이상 성인남녀 100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면접 조사(최대허용 표집오차는 95% 신뢰 수준에서 ±3.1%로, 표집은 성별·연령별·지역별 비례할당 후 무작위 추출)를 통해 한·미 동맹의 과거와 현재를 평가하고, 미래에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중앙일보 창간 58주년과 한·미 동맹 70주년을 맞아 중앙일보와 동아시아연구원(EAI)이 공동 기획한 심층 대면 면접조사 결과 한·미 양국의 대북 확장억제 강화 방안을 담은 '워싱턴 선언'에 대해 국민은 대체로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57.6%는 "워싱턴 선언이 북한의 위협에 대한 적절한 대응으로, 한국의 안보 우려를 해소하기에 충분하다는 평가에 동의한다"고 답했다.반면 동의하지 않는다는 비율은 26.2%로 안보 우려 해소에 충분하다는 응답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3.4%에 불과했다. 모르겠다는 대답은 16.2%였다.
여기엔 한국을 직접 노리는 북한의 핵 위협이 심각해진 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전술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각종 신형 탄도미사일을 빈번하게 시험발사하며 대남 위협의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
이에 대응해 한·미가 지난 4월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워싱턴 선언에 따라 핵협의그룹(NCG)을 신설하고, 지난 7월에는 NCG 첫 회의에 맞춰 미 해군의 전략핵잠수함(SSBN)인 켄터키 함을 부산항에 기항시키는 등 가시적인 대북 억제 조치를 취한 데 여론도 호응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치 성향에 따라 응답 비율에 차이는 있었는데, 진보층에서도 우려가 해소됐다(46.7%)는 응답이 그렇지 않다(39.2%)는 비율보다 많았다. 대체로 한·미가 확장억제를 강화하는 것이 북핵 위협 대응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는 얘기다. 워싱턴 선언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밝힌 응답자 중 15.9%만이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해야 한다고 응답한 점도 이런 분위기를 뒷받침한다.
여기에는 한·미가 "북한의 어떠한 핵 공격도 북한 정권의 종말로 귀결될 것이며, 한국에 대한 어떠한 핵 공격도 즉각적(swift), 압도적(overwhelming), 결정적(decisive) 대응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에 더해 김정은 정권이 두려워할 만한 미국의 최신예 전략자산을 수시로 한반도에 전개하며 연합 작전 수행능력을 과시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손열 EAI원장(연세대 교수)은 "북한이 핵을 최대한 고도화하는 상황에서 억제력을 우선 강화하는 조치는 필수 불가결한 상황"이라며 "워싱턴 선언을 통해 한·미 양국은 북한의 핵무기 사용이 북한 정권의 종말로 이어질 것이란 메시지를 분명히 했고, 상당한 억지 효과를 발휘했다는 것이 북한의 반응을 통해서도 나타났다"고 말했다.
실제 북한은 지난 4월 한·미 정상회담 직후 대남·대미 문제를 총괄하는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명의의 입장을 통해 "'워싱턴 선언'은 가장 적대적이고 침략적인 행동 의지가 반영된 극악한 대조선적대시정책의 집약화된 산물"이라며 반발했다.
이어 NCG 첫 회의를 하루 앞둔 지난 7월 17일에도 김여정 명의의 담화를 통해 한·미의 확장억제 강화에 반발하며 이제는 제재 완화나 미 전략자산 전개 중단, 심지어는 주한미군을 철수해도 비핵화는 하지 않겠다는 억지 주장을 늘어놨다. 한·미의 확장억제 강화가 자신들에게 미칠 파장을 우려해 그만큼 날 선 반응을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공교롭게도 여론조사 기간(8월 25일~9월 13일)에 북한은 각종 도발을 감행하면서 한·미에 대한 위협의 수위를 높였다. 조사 전날인 지난 8월 24일 군사정찰위성 발사를 시작으로, 29일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한군 총참모부에서 전군지휘훈련을 점검하면서 노골적으로 남침을 시사하는 발언을 내놨다.
이어 9월 2일에 순항미사일 2발을 발사하며 '전술핵공격 가상발사훈련'이라고 밝히는 한편 8일에는 핵 공격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전술핵공격잠수함'을 공개하기도 했다. 13일에는 김정은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북·러 간 전방위적인 군사협력을 예고했다.
이런 상황은 조사 결과에도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한국이 당면한 가장 큰 위협 요인을 묻는 질문(1·2순위 복수응답)에 가장 많은 응답자의 56.3%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라고 답했다. 이는 지난해 44.4%와 비교해 11.9%p나 급증한 수치다. 또 지난해에는 주요국 간 무역·첨단 기술 갈등이 가장 큰 위협이라고 꼽은 응답자가 제일 많았는데(60.8%), 이번에는 위협 인식 순위가 바뀌었다.
다만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을 심각하게 보면서도 연령대별로 인식 차이는 있었다. 30대(52.0%)와 40대(53.0%)에선 북한을 최고 위협으로 보는 의견이 상대적으로 낮았지만, 20대는 55.3%로 60대(59.2%), 50대(57.7%)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비율을 보였다. 이는 정의와 공정에 민감한 20대의 보수화된 성향과 함께 정서적으로 민감한 청소년기에 북한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 등을 목격한 영향일 수 있다.
또 정치성향을 기준으로 봤을 때 진보층은 북한의 핵·미사일(49.8%)보다 주요국간 무역·첨단기술 갈등(56.8%)을 더 큰 위협으로 보고 있었다. 중도의 경우에도 차이는 근소하지만, 주요국간 무역·첨단기술 갈등을 더 큰 위협으로 인식(56.8%〉52.5%)하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