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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편 62장면 칼질…유신 검열시대 영화감독 비춘 '거미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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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운 감독의 신작 영화 '거미집'은 유신정권의 검열이 엄혹했던 1970년대, 다 찍은 동명 영화의 결말만 바꾸면 걸작이 될 거라 믿는 김열 감독(송강호)의 고군분투를 그렸다. 사진은 영화 속 흑백영화 '거미집' 장면이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김지운 감독의 신작 영화 '거미집'은 유신정권의 검열이 엄혹했던 1970년대, 다 찍은 동명 영화의 결말만 바꾸면 걸작이 될 거라 믿는 김열 감독(송강호)의 고군분투를 그렸다. 사진은 영화 속 흑백영화 '거미집' 장면이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어이쿠, 정말 아프군.” 턱선까지 구레나룻을 기른 배우의 과장된 억양은 옛 충무로 방화가 떠오른다. 강렬한 흑백화면의 명암 대비를 위해 오래전 현장에서 은퇴했던 텅스텐 조명기기도 돌아왔다. 지난해 3~6월 촬영한 김지운 감독의 10번째 장편 ‘거미집’ 현장이다. 1970년대 엄혹한 검열 속에 동명 영화의 결말을 단 이틀간 다시 찍으려는 중견 감독(송강호)의 고군분투를 그린 영화 ‘거미집’이 27일 추석 극장가를 찾는다.
김 감독이 데뷔작 ‘조용한 가족’(1998)부터 함께한 페르소나 배우 송강호가 주인공 김열을 맡아 올해 칸 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다. 주인공은 주목 받은 데뷔작 이후 변변찮은 감독으로 전락한 김열. 이미 신작 ‘거미집’을 다 찍은 그에게 어느 날 영화를 걸작으로 만들 새로운 결말이 불현듯 떠오른다.

김지운 신작 '거미집' 27일 개봉 #실제 70년대 검열 칼날 어땠나

'유신 검열시대' 영화감독의 몸부림

극 중 그의 영화 ‘거미집’은 한 방직공장에 시집간 신여성(임수정)이 고부갈등과 무능한 남편(오정세), 탐욕스러운 후처(정수정)로 인해 비통한 최후를 맞는 내용이다. 김열 감독은 현모양처의 이런 순애보적 비극을 투쟁적 결말로 바꾸려 한다. 유신정권의 군홧발에 짓밟힌 창작 욕구의 표출이기도 하다.
재촬영이 귀찮은 제작자(장영남), 스타 주연 배우들의 몰이해, 검열 기관의 훼방을 김열이 돌파하는 과정이 ‘조용한 가족’풍 블랙코미디로 펼쳐진다면, 영화 속 흑백영화엔 불온한 전복의 기운이 가득하다.

          영화 '거미집'에서 영화감독 김열(가운데, 송강호)은 현장까지 난입한 검열기관 공무원들을 따돌리고 이틀 안에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진땀을 뺀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영화 '거미집'에서 영화감독 김열(가운데, 송강호)은 현장까지 난입한 검열기관 공무원들을 따돌리고 이틀 안에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진땀을 뺀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왜 지금, 70년대를 돌아봤을까. 김지운 감독은 지난 14일 언론시사 후 간담회에서 “개인적으로 1960~70년대 한국 지식인‧예술가‧영화감독들의 룩을 좋아한다. 그런 예술가의 초상을 만들고자 했다”면서 “팬데믹 이후 한국영화 위축 속에 영화는 무엇인가, 다시 의미를 묻게 됐고 이를 관객들한테 보여주고 싶었다”고 답했다.
이만희‧김기영‧유현목‧김수용‧하길종 등 당대 활동한 선배 감독을 언급하면서다. 영화에도 당대 감독, 영화사를 떠오르게 하는 이름들이 등장한다. 출연 배우 중 유일하게 그 시절 활동한 박정수는 “70년대는 드라마 현장도 중앙정보부가 나와서 직접 검열했다”고 돌이켰다.

유신 검열…김기영 영화 62장면 삭제·변경

실제 70년대 한국영화는 60년대 황금기를 지나 침체의 늪에 빠졌다. 경제성장에 따른 TV 보급, 가혹한 검열과 유신정책 영향으로 정부 입맛에 맞춘 국책 영화가 양산된 게 주요 요인으로 꼽힌다(김미현 『한국 영화 역사』). 한국영상자료원이 2016년부터 일반에 공개한 60~70년대 영화 검열서류 2000여건 중엔 유명 작품도 많다.
60년대 ‘7인의 여포로’로 반공법 위반으로 투옥됐던 이만희 감독은 73년 국방부 지원작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반공이 아닌 반전에 초점 맞춰 만든 탓에 곤욕을 치렀다. 김기영 감독의 ‘미녀 홍낭자’(1969)는 미신 조장 우려를 이유로 무려 62장면을 삭제하거나 변경한 뒤에야 합격판정을 받았다.

영화 속 영화 '거미집'에서 동명의 주인공을 연기한 이민자. 김지운 감독과 '장화, 홍련'으로 인연 맺은 배우 임수정이 연기했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영화 속 영화 '거미집'에서 동명의 주인공을 연기한 이민자. 김지운 감독과 '장화, 홍련'으로 인연 맺은 배우 임수정이 연기했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배우 오정세, 박정수는 70년대 베테랑 배우이자,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모자관계를 연기했다. 나선 계단은 욕망의 눈과 같은 역할을 한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배우 오정세, 박정수는 70년대 베테랑 배우이자, 영화 속 영화 '거미집'의 모자관계를 연기했다. 나선 계단은 욕망의 눈과 같은 역할을 한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영상자료원의 ‘1972년 이후 영화정책 변화’  관련 해제에 따르면, 이 시기 영화 검열은 71년 박정희 대통령이 선포한 국가비상사태에 따른 영화시책이었다. 제작된 작품 수정‧반려 차원이 아니라, 시나리오 단계부터 검열해 제작 여부를 허가한 최고 수준의 검열이었다.

관객수 반토막 돌파구…새로운것 찾는 욕망

성룡의 ‘취권’ 같은 홍콩 무술영화, ‘닥터 지바고’ ‘대부’ ‘벤허’ 등 해외 대작들 공세도 거세졌다. 69년 1억7300만명에 육박했던 영화 관객 수는 76년 7000만명 이하로 곤두박질쳤다. 한국영화 점유율은 연간 20~30%로 축소됐다.
김지운 감독은 당대 이런 불황의 돌파구를 “구태의연한 것, 자신의 어떤 세계를 뒤집어보고 새로운걸 찾아내려는 김 감독(창작자)의 욕망”에서 찾았다. 이를 영화 속 영화 ‘거미집’에 상징적으로 새겼다. 시대의 억압에 속박당한 영화계 풍광을 거미줄에 휘감긴 장면에 담았다.

"70년대 韓영화 촬영, 해외수준 뒤지지 않아"

정이진 미술감독은 '거미집' 미술에 고(故) 김호길 소품 대표가 70년대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와 직접 찍은 자료 사진들을 보여줘 큰 도움이 됐다고 감사를 전했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정이진 미술감독은 '거미집' 미술에 고(故) 김호길 소품 대표가 70년대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와 직접 찍은 자료 사진들을 보여줘 큰 도움이 됐다고 감사를 전했다. 사진 바른손이앤에이

70년대 영화 풍을 되살린 촬영‧미술도 볼거리다. 각각 김지용 촬영감독(‘달콤한 인생’ ‘남한산성’ ‘헤어질 결심’), 정이진 미술감독(‘택시운전사’ ‘마약왕’)이 맡았다. 제작 과정에서 당대 한국 영화 수준을 재인식하는 계기도 됐다고 한다.
신상옥‧김기영‧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정 미술감독은 “70년대 표현 기법은 현대 영화보다 독창적이고 기괴하게도 보였다. 컴퓨터그래픽(CG)이 없어서 수작업이 정교하고 허용되는 표현기법이 오히려 많게 느껴졌다”고 했다. 방직공장과 거미를 연결시킨 이미지들이 한 예다.
70년대는 이미 컬러 영화가 주류를 이뤘지만, ‘거미집’은 일부러 흑백을 택했다. 김 촬영감독은 참고한 작품으로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이만희 감독의 ‘마의 계단’(1964), 미국 누아르 영화 ‘사냥꾼의 밤’(1955)을 들었다. “‘거미집’은 그림자가 강한 표현주의적 조명, 과장된 프레이밍에 영향을 받았다”면서다.
그는 또 “당시 한국 영화를 찾아보다 ‘하녀’ ‘삼포 가는 길’(1975)을 촬영한 김덕진 촬영감독의 영화 ‘고려장’(1963)을 처음 보고 해외 작품에 뒤지지 않는 기술적 완성도에 놀랐다”면서 “‘거미집’ 숲속 세트 장면에 좋은 참고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 5월 25일 오후(현지시간) 프랑스 남부 칸 팔레 데 페스티발(Palais des Festival)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열린 제76회 칸 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 초청작 ‘거미집’ 시사회에서 김지운 감독(오른쪽 네번째)과 출연진들이 레드 카펫에 오르기 전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고 있다. 뉴스1

지난 5월 25일 오후(현지시간) 프랑스 남부 칸 팔레 데 페스티발(Palais des Festival)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열린 제76회 칸 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 초청작 ‘거미집’ 시사회에서 김지운 감독(오른쪽 네번째)과 출연진들이 레드 카펫에 오르기 전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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