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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 돌아와? 본질은 흙수저의 꿈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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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강제규 감독은 영화 ‘1947 보스톤’을 “첫 태극마크 승리일뿐 아니라 흙수저 청년의 인간승리 도전”이라 했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강제규 감독은 영화 ‘1947 보스톤’을 “첫 태극마크 승리일뿐 아니라 흙수저 청년의 인간승리 도전”이라 했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1947년 4월 19일, 보스톤(표기법상은 ‘보스턴’이지만 영화 제목에 맞춤) 마라톤에서 단신의 조선 청년이 우승했다. 승부처는 코스 막판 ‘하트 브레이크(심장 파열) 언덕’으로 불리는 뉴턴힐이었다. 청년은 오르막길에서 치고 나갔다. 뛰어든 개를 피하다 넘어졌지만, 일어나 다시 달렸다. 2시간 25분 39초.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코리아’에서 온 서윤복(1923~2017)이었다.

보스톤 마라톤 동양인 첫 우승이자, 해방 후 국제대회 첫 우승이었다. 서윤복을 길러낸 이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1912~ 2002)이다. “가슴에 빛나는 태극마크… 나는 서군이 부러웠다.”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속 손기정의 회고다. 베를린올림픽 시상대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가렸단 이유로 일제에 의해 더는 마라톤을 못 하게 된 손기정은 훗날 코치가 된 베를린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남승룡(1912~2001)과 함께 서윤복을 길러냈다. 서윤복은 스승이 베를린에서 세운 세계기록(2시간 26분 42초)을 11년 만에 경신했다.

세 사람 이야기인 영화 ‘1947 보스톤’(27일 개봉)이 추석 극장가를 찾는다. 강제규(61) 감독이 연출했다. 남북한 분단 역사를 소재로 한국형 블록버스터 ‘쉬리’(1999)를 탄생시켰고, 형제를 갈라놓은 민족상잔의 비극을 대규모 전투 액션에 담은 ‘태극기 휘날리며’(2004)로는 천만 관객을 동원했다. ‘1947 보스톤’으로 국가의 운명에 휘말린 개인의 초상이란 주제를 잇는다.

강제규 감독은 영화 ‘1947 보스톤’을 “첫 태극마크 승리일뿐 아니라 흙수저 청년의 인간승리 도전”이라 했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강제규 감독은 영화 ‘1947 보스톤’을 “첫 태극마크 승리일뿐 아니라 흙수저 청년의 인간승리 도전”이라 했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미 군정 상황으로 인해 성조기를 달고 달릴 뻔한 주인공이 태극마크를 되찾고 보스톤 마라톤에서 역전 우승하는 과정이 도드라진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냉면 배달로 ‘재능을 낭비하던’ 극 중 서윤복(임시완)이 남승룡(배성우)·손기정(하정우) 코치에 의해 마라톤 선수로 각성하는 과정은 다소 낯익은 설정이다. 강 감독은 “흙수저 청년의 인간 승리와 역사적 마라톤 우승 장면을 연결하는 게 이번 영화의 동기였다”고 했다.

지난 12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강 감독은 “처음부터 중요했던 장면이, 어린 시절 서낭당에서 밥을 훔쳐 먹으려고 수없이 달린 무악재 고개가 보스톤에서 1·2등을 추월한 하트 브레이크 언덕과 어떻게 만나는가였다”며 “광복 이후 최초로 태극기를 달고 달린 뿌듯함 만큼 한 인간이 소중한 꿈을 이루는 도전에 무게를 실었다”고 소개했다. 어쩌면 ‘국뽕’이 더는 흥행공식이 아닌 엔데믹 시대 생존전략일지 모른다.

배우 하정우(앞줄 오른쪽)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이자 차세대 선수 서윤복(임시완)을 길러낸 코치 손기정 선수를 연기했다. 실제 촬영 과정에선 마라토너 권은주 선수가 마라톤 현장 지도를 맡았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배우 하정우(앞줄 오른쪽)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이자 차세대 선수 서윤복(임시완)을 길러낸 코치 손기정 선수를 연기했다. 실제 촬영 과정에선 마라토너 권은주 선수가 마라톤 현장 지도를 맡았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국뽕’은 기획 초반부터 우려했다”는 그는 “요즘 20, 30대 관객이 1940년대 얘기에 별 관심 없잖나. 대학 때 영화 ‘불의 전차’(1981)를 보며 달리기 영화를 꼭 만들고 싶었기에 젊은 관객이 그 시대 손기정·남승룡·서윤복에 자연스럽게 동화될 수 있도록 각색 작업으로 허들을 허무는 데 집중했다”며 “세 주인공이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흙수저에서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달리기를 통해 꿈을 실현하고 생존해나가는 과정이 매력이다. 태극마크로 우승한 감격은 부가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손기정은 ‘내가 국가’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서윤복만 해도 나라 없는 시절을 손기정만큼 뼈저리게 느끼지 않은 세대예요.” 요즘 관객까지 포함해, 국가와 나의 관계에 대한 시대별 차이를 가늠해볼 만한 영화다.

사실 ‘1947 보스톤’은 윤제균 감독이 먼저 손기정 영화(현재 CJ ENM을 통해 한미 합작으로 준비 중)를 진행하던 상황에서 기획됐다. 이후 강 감독은 손기정·남승룡·서윤복 세 사람이 힘을 합친 불굴의 도전기에 비중을 실어 2020년 1월 촬영을 마쳤다. 그런데 사달이 났다. 주연 배우 배성우가 음주사건을 일으킨 것. 코로나19팬데믹까지 겹쳤다. 배성우 분량을 가능한 한 재편집했다.

영화에는 서윤복·남승룡이 대회 주최 측을 설득해 태극기만 달고 뛴 거로 나오지만, 당시 자료를 보면 정황상 미 군정의 성조기와 태극기를 함께 달았을 가능성이 있다. 강 감독은 “여러 설이 많다. 정설이란 게 없다”고 답했다. 고증 논란에도 역사물에 도전하는 이유에 대해 강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사실 SF에도 도전하려 했지만, 미래는 할리우드에서 많이 찍잖아요. 결국 우리 살아온 과거 잘 들여다보는 게 미래를 예견하는 일 아닐까요. 우리가 몰랐던 소중한 발자취를 다루는 게 어쩌면 SF란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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