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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유전자 있다" 유방 미리 절제한 졸리…과학계 경악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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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데이비드 무어 지음
정지인 옮김
아몬드

할리우드 배우 안젤리나 졸리는 2013년 ‘예방적 유방절제술’을 받았다. 자신에게 유방암과 난소암 발생을 증가시킬 수 있는 브래카1(BRCA1) 유전자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개인적 결정을 뭐라 할 순 없지만, 졸리의 선택은 의학계·과학계를 경악시켰다. 브래카1은 모든 사람에게서 발견되며, 이것이 있다고 반드시 발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 신경과학자로 인간발달에 영향을 주는 유전과 환경, 후성(後成)유전적 요인을 연구해온 지은이의 설명은 또 다른 방향에서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한다. 그는 “배아 상태에서 결정된 개인의 DNA 구성만으로는 앞으로 어떤 병을 앓게 될지 알 수 없다”고 설명한다. 유전자가 있다고 모두 발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어떤 DNA도 단독으로는 아무런 질병도 유발할 수 없다”는 말로도 요약한다. ‘암기 천재 유전자’가 있다고 해도 뭔가 읽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양봉가가 트럭서 떨어진 벌통에서 나와 차량에 붙어 있는 벌들을 제거하려는 모습. [AP=연합뉴스]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양봉가가 트럭서 떨어진 벌통에서 나와 차량에 붙어 있는 벌들을 제거하려는 모습. [AP=연합뉴스]

이처럼 유전물질이 다양한 상황이나 맥락에 따라 활성·비활성화하면서 비로소 발현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 후성유전학(Epigenetics)이다. 이런 연구에 따르면 얼굴 모양 같은 신체적 형질과 심리적 특성 등 인간의 특성은 생물학적 분자인 유전자가 그 사람이 처했던 상황 및 겪었던 경험과 상호작용한 결과다. 곤충 연구를 보자. 여왕벌과 일벌은 동일 유전체를 물려받은 일란성 쌍둥이인데도 역할도 외형도 확연히 다르다. 이 둘은 성장과정에서 서로 다른 것을 먹었을 뿐이다.

2003년 미국 듀크대 의료센터가 유전적으로 동일한 검은색 암컷 생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 결과는 외부 요인이 유전자의 발현을 좌우할 수 있음을 확인시켰다. 연구팀은 생쥐를 두 집단으로 나눠 한쪽에겐 일반 먹이, 다른 쪽에는 특수 먹이를 줬다. 특수 먹이에는 DNA 합성에 관여하는 코발라민(비타민 B12)과 태아의 신경‧혈관 발달에 필요한 엽산, 세포막 구성에 필요한 콜린 등을 보충했다.

그랬더니 두 집단의 새끼는 유전적으로 동일한데도 털빛이 각각 달랐다. 특수 먹이를 먹은 생쥐의 새끼는 중간 갈색에 노란 얼룩이 있는 털을 가졌다. 먹이가 ‘아구티 유전자’라는 걸 발현한 결과로 분석됐다. 이 유전자는 털빛뿐 아니라 비만‧당뇨‧암 유발에도 관여한다고 한다.

지난 7월 7일 태어난 쌍둥이 아기 판다의 이름을 정하기 위한 온라인 투표가 시작됐다.   에버랜드는 제안받은 이름 4만여개 가운데 10쌍을 추려, 오는 20일까지 1차 온라인 투표를 한다고 14일 밝혔다. 연합뉴스

지난 7월 7일 태어난 쌍둥이 아기 판다의 이름을 정하기 위한 온라인 투표가 시작됐다. 에버랜드는 제안받은 이름 4만여개 가운데 10쌍을 추려, 오는 20일까지 1차 온라인 투표를 한다고 14일 밝혔다. 연합뉴스

이는 분자 단위의 유전과학이 작동한 결과라는 게 지은이의 설명이다. 유전물질인 DNA는 아데닌‧구아닌‧시토신‧티민의 네 가지 염기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 중 아데닌과 시토신에는 메틸기가 추가되는 ‘DNA 메틸화’가 생길 수 있다. 메틸화된 DNA는 세포에서 유전자 발현을 변화시키며, 후손에게 유전된다. 세포에서 유전자 발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히스톤이란 단백질에서도 아세틸화 등이 이뤄지며 후손에 유전된다.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는 후성유전의 핵심표지다. 생쥐의 아구티 유전자 발현은 DNA 메틸화의 결과라는 설명이다.

스페인 국립암센터가 전 세계 연구자들과 함께 일란성 쌍둥이 40쌍의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를 조사해 2005년 발표한 결과도 의미가 크다. 메틸화나 아세틸화 등 후성유전적 표지 패턴은 젊은 일란성 쌍둥이끼리는 비슷했다. 하지만 이들이 각자의 삶을 살고 서로 다른 경험이 쌓인 뒤로는 현저한 차이가 생겼다. 서로 다른 환경과 경험이 DNA에 표시를 남기며, 이것이 유전체가 발현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다.

이처럼 후성유전은 암, 자가면역질환, 조현병, 양극성장애, 노화 등 건강문제는 물론 기억형성과 학습, 체중과 직업 역량 등 우리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지은이의 지적이다. 원제 The Developing Genome: An Introduction to Behavioral Epigene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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