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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m 산에 올랐을 때…'75세 청년'은 펑펑 울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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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키 147cm 여성 트레커 김순식씨

호모 트레커스

키 147㎝, 체중 51㎏의 70대 중반 여성이 안나푸르나·산티아고 순례길·킬리만자로를 걷고 올랐습니다. 그것도 60대 이후에 이룬 일입니다. 서울에서 부동산 일을 하던 평범한 주부입니다. 남편 따라 간 870m 첫 산행에서 혼쭐이 났다죠. 이젠 3000m 이상 해외 고산지대에서도 너끈하게 트레킹합니다. 세상의 정상에서 펑펑 우는 할머니의 사연을 들어보시죠.

가사와 일에 쫓기다가 건강에 이상을 느껴 걷기 시작했다. 업그레이드하다 보니 어느새 해외 고산·트레킹 준프로가 되어 었다. 존 뮤어 트레일의 종착지인 휘트니산 정상(4421m)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김순식(오른쪽)씨. [사진 유라시아트렉]

가사와 일에 쫓기다가 건강에 이상을 느껴 걷기 시작했다. 업그레이드하다 보니 어느새 해외 고산·트레킹 준프로가 되어 었다. 존 뮤어 트레일의 종착지인 휘트니산 정상(4421m)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김순식(오른쪽)씨. [사진 유라시아트렉]

김순식(75)씨는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여성이다. 그러나 걷기만큼은 비범하다. 4대강(한강·금강·영산강·섬진강) 국토 종주, 네팔 에베레스트·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 존 뮤어 트레일(미국·358㎞), 산티아고 순례길(스페인·800㎞), 킬리만자로(탄자니아·5895m) 등정, 아일랜드 피크(네팔·6189m) 등반 등을 60~70대에 걸쳐 해냈다. 다녀온 명소 7곳을 골라 책(『70세 청년 김순식의 트레킹 일기』)도 냈다.

걷기 시작은 십수 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가사와 부동산중개 일을 병행하던 중 체중이 늘고 체력이 떨어져 동네병원을 찾았다. “백혈병이 의심되니 큰 병원을 가보라”는 말을 들었다. 중한 병은 아니었지만,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았고, 지방간 증세를 보였다. 집 근처 서울 올림픽공원과 경기 하남 검단산(657m)에서 걷기 시작했다. 김씨는 차령산맥 아래 산골(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어쩌다 걷기가 취미가 돼 세계 곳곳을 걸었다. 그런데 산꼭대기에만 오르면 어머니가 생각나 울었다. 어릴 적 어머니랑 이 산 저 산을 다니며 나무를 했다. 그때 산행 요령을 배웠다. 어머니가 걷기 스승이었다.

존 뮤어 트레일(코스 길이 358㎞)에서 김순식씨가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진 유라시아트렉]

존 뮤어 트레일(코스 길이 358㎞)에서 김순식씨가 기념 촬영하고 있다. [사진 유라시아트렉]

걷기 덕분에 골다공증 척도인 골밀도 검사 결과(T-수치)가 역주행하기도 했다. 지난달 보건소에서 검사하니 3년 전 -2.9였던 T-수치가 -2.5로 개선됐다. 보건소 관계자가 “약을 먹었나” 물었다. 김씨는 걷기를 만병통치약이라 생각한다. 일본의 걷기 전도사인 의사 나가오 가즈히로는 “아파서 못 걷는 게 아니라 걷지 않아서 아픈 것”(『병의 90%는 걷기만 해도 낫는다』)이라고 했는데, 김씨도 이 말을 철칙으로 삼았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지난달 말 김씨와 섬진강 자전거길 동해마을~남도대교 20㎞를 함께 걸었다. 섬진강을 끼고 걷는 길이다. 김씨는 국내에서 가장 좋았던 길이라고 했다. 뒤따라 걸으며 자세를 유심히 살폈다. 허리가 살짝 굽었지만, 선 자세는 나이를 고려해도 곧았다. 걸음을 옮길 때도 양발이 거의 ‘11자’를 유지했다. 특이하게도 걸을 때 양팔을 크게 젖혔다.

지인과 함께 섬진강 자전거길 구례 구간을 걷고 있는 김씨(오른쪽). 김영주 기자

지인과 함께 섬진강 자전거길 구례 구간을 걷고 있는 김씨(오른쪽). 김영주 기자

걸을 때 가장 주의하는 건 ‘뒤꿈치부터 땅에 닿기’다. 속도는 빠르지 않다. 시속 5㎞ 안팎이다. 오래 걷기 위해선 발바닥에 부담을 덜 주면서 평속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발뒤꿈치가 먼저 땅에 닿아야 발이 덜 아프다. 보폭을 살짝 넓게 하면 자연스럽게 발뒤꿈치부터 땅에 닿는다. 김씨의 등산화는 평범했다. 캠프라인미드컷(발목을 덮는) 등산화로, 10년 넘게 신었다. 평지에서는 끈을 헐겁게 매 발목을 완전히 감싸지는 않는다. 오르막에서는 끈을 더 조이는 편이다. 평지에선 스틱을 쓰지 않고, 대신 팔을 앞뒤로 젖히며 걷는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김씨의 첫 산행은 경북 봉화 청량산(870m)이었다. 암릉이 있어 초보자에게 쉽지 않다. 남편 산악회를 따라갔는데, 머릿속에 남은 게 없을 만큼 혼쭐났다. 당시엔 체중이 많이 나갔고 근력도 부족했다. 이상하게 그날 이후 ‘다시 산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검단산을 훈련장으로 삼았다. 새벽마다 정상까지 3.5㎞를 오른 뒤 출근했다. 몇 달 하자 몸이 반응했다. 페이스를 유지하며 천천히, 대신 쉬지 않고 걷는 게 습관이 됐다. 점차 거리를 늘려 검단산 종주로 이어갔다. 노적산과 남한산성을 거쳐 마천동(또는 하남 광암정수장) 쪽까지 약 30㎞다. 짧은 산행이 성에 차지 않았다.

호모 트레커스 Q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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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로 눈을 돌렸다. 2007년 중국 황산·삼청산을 시작으로, 2008년 코타키나발루(말레이시아·4095m), 2009년 백두산, 2010년 대만 옥산(3952m)에 올랐다. 천천히 걷되 페이스를 유지하는 습관이 3000m 이상 고소에 맞았다. 해외 산행 중에는 존 뮤어 트레일과 아일랜드피크 등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휘트니산(4421m) 정상에선 소리 내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억척스러울 정도로 부지런했다. 생계도 어머니가 책임졌다. 그런 어머니를 빼닮아 나 역시 억척스럽게 일하고 또 산에 가게 된 것 같다”고 했다. 69세에 실패한 아일랜드피크 등정을 재도전하는 게 김씨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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