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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강도·해상노예·쓰레기...범죄와 불법 난무하는 21세기 바다[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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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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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법의 바다
이언 어비나 지음
박희원 옮김
아고라

바다의 이미지는 평온‧고요‧평화다. 하지만 미국 뉴욕타임스(NYT) 탐사보도 기자 출신의 지은이가 파헤친 현대 바다의 실체는 범죄와 불법 행위가 난무하는 디스토피아적 공간이다. 살인 등 해상 잔혹범죄, 21세기에도 뿌리 뽑히기는커녕 더욱 기승을 부리는 해적질, 일부 선원들이 ‘바다노예’처럼 생활하며 시달리는 가혹한 노동, 그리고 밀수 등 글로벌 범죄가 망망대해 공해상에서 벌어진다.

지은이에 따르면 바다는 인류에게 지극히 유용한 공간이다. 해상 운송은 항공 운송보다 훨씬 싸다. 전 세계 상품의 90%가 선박으로 운송되는 이유다. 160만 명이 화물선‧탱커를 비롯한 상선을, 5600만 명 이상이 어선을 타고 일하는 노동 현장이 된 배경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해양환견단체 시셰퍼드의 선박을 타고 불법 조업 어선을 추적 현장을 목격한다.[사진 아고라]

지은이는 해양환견단체 시셰퍼드의 선박을 타고 불법 조업 어선을 추적 현장을 목격한다.[사진 아고라]

게다가 공해는 규제로부터 자유롭다. 특정 국가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공백 상태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시리아에서 노획한 화학무기를 해체하고, 테러 관련자를 심문하며, 9‧11테러를 기획한 오사마 빈 라덴의 시신을 처리할 장소로 공해를 선택한 이유다.

광활한 바다에선 조세 피난부터 무기 비축까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일이 벌어지지만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지은이가 소개하는 사례는 적나라하다. 5년 전 남태평양 섬나라 피지에선 택시에 손님이 두고 간 휴대전화에서 해상 살인 현장이 담긴 동영상이 발견됐다. 뒤집어진 목선에서 네 명의 남자가 한 명씩 도리깨에 맞아 숨져가는 끔찍한 장면이었다. 휴대전화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묻혀버릴 악랄한 범죄였다.

지은이가 직접 취재한 태국의 미등록 어선의 상황은 충격적이다. 빚을 갚기 위해 왔다는 캄보디아인 소년과 남자 30여 명이 배를 타고 하루 18~20시간 조업한다. 4.5m의 너울과 38도의 고온에서도 일을 멈추지 않는다. 선장은 작업시간을 늘리기 위해 선원들에게 먹일 각성제까지 준비했다. 일부는 어망에 손가락에 잘리기까지 하지만 이런 사고에 쓸 의약품은 갖추지 않았다.

인도네시아 순찰선이 분쟁 수역에서 베트남 선박을 억류한 모습. [사진 아고라]

인도네시아 순찰선이 분쟁 수역에서 베트남 선박을 억류한 모습. [사진 아고라]

지은이는 2010년 8월 한국 냉동가공선 오양70호가 뉴질랜드 동쪽 해역에서 청대구를 잡다 침몰해 선원 51명 가운데 45명이 구출되고 한국인 선장을 비롯한 6명이 실종된 사건도 소개한다. 열악한 해상 노동조건과 안전‧인권 문제는 놀라울 정도다.

비영리 해양환경단체 시셰퍼드는 전 세계 정부가 손 놓고 있는 불법 조업 선박 추적에 나서고 있다. 지은이는 이 단체의 선박에 승선해 남극해양생물보존위원회(CCAMLR)가 지정한 보호 해역에서 여섯 척의 나이지리아 선박이 원정 불법 조업을 하려는 현장을 목격했다. 인터폴에서 ‘여섯 날강도’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선박들이다. 여기에는 스페인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인 갈리시아 출신이 주축인 사관들과 대부분 인도네시아인인 선원들이 타고 있었다. 가난이 바다의 불법행위를 부추기는 셈이다. 하지만 공해상에서 이들을 단속하고 나포할 권한은 국제법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이런 불법조업을 통한 전 세계 수산물 암시장 규모가 200억 달러를 웃돈다고 지적한다.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생선 다섯 마리 중 한 마리가 불법 어획물이라고 한다. 문제는 불법조업이 남획으로 이어져 전 세계 물고기 씨가 말라간다는 사실이다. 2050년이 되면 바다에 물고기보다 플라스틱 쓰레기가 더 많아질 것이라는 연구도 있을 정도다. 지은이는 해운업계와 수산업계가 바다에서 벌어지는 무법행위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고 수혜자이기도 하다고 주장한다.

소말리아 푼틀란드의 보사소항에 배들이 정박한 모습. [사진 아고라]

소말리아 푼틀란드의 보사소항에 배들이 정박한 모습. [사진 아고라]

바다에는 인간이 건설했다가 포기한 해상구조물이 숱하게 녹슬어가고 있다. 그중 하나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독일 폭격기를 중간에 차단하기 위해 해안에서 11㎞ 떨어진 바다 위에 건설한 해상 벙커다. 한데 영국군 소령 출신의 페디 로이 베이츠가 1967년 이곳에 올라가 ‘시랜드 공국’이라는 국가를 선포했다. 어느 나라의 승인도 받지 못한 허풍선이 나라지만, 영국이 어떤 조치를 취할 수도 없는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같은 해 베이츠의 아들이 다가오는 선박에 권총을 쏜 사건에 대해 영국 법원은 영국의 관할권 밖이어서 영국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영국은 당시 육지에서 3해리(5556m)까지를 영해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12해리로 바뀌었다.

지은이는 특히 바다가 인간들의 쓰레기 투기장으로 변한 지 오래됐다고 개탄한다. 선박에서 버리는 폐수와 기름은 물론 육상에서 바다로 버려지는 쓰레기도 어마어마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가운데 생분해가 어려운 플라스틱류 정도만 환경문제로 인식하는 수준이다. 지은이는 광활한 바다가 만물을 흡수하고 소화하며 정화할 것이라는 고정관념과 해상 쓰레기 투기에 대한 법적‧행정적 무관심이 이런 사태를 부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바다가 글로벌 범죄의 온상이 된 이유에 대해 어느 나라의 주권도, 어느 기관의 감시도, 어느 정부의 관심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국제법적 제한도 문제지만 각국 정부의 무관심과 책임회피가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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