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정조께 인사 올렸다"…『열하일기』 뼈대 『연행음청』 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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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대표 작품인 『열하일기』의 뼈대인 친필 초고본 『연행음청(燕行陰晴)』 의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사진은 『연행음청』 겉표지. '연암산방(燕巖山房)'이라고 인쇄된 연암의 개인 원고지에 쓰였다.『연행음청』 제목 아래 '곤(坤)'이 표기돼 있는데, 연암 사후 원고 정리과정에서 추가로 써 넣은 것으로 보인다. 기사엔 '곤'을 생략했다. [사진 단국대]

연암 박지원 대표 작품인 『열하일기』의 뼈대인 친필 초고본 『연행음청(燕行陰晴)』 의 존재가 처음 확인됐다. 사진은 『연행음청』 겉표지. '연암산방(燕巖山房)'이라고 인쇄된 연암의 개인 원고지에 쓰였다.『연행음청』 제목 아래 '곤(坤)'이 표기돼 있는데, 연암 사후 원고 정리과정에서 추가로 써 넣은 것으로 보인다. 기사엔 '곤'을 생략했다. [사진 단국대]

조선 후기 실학자 겸 소설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쓴『열하일기(熱河日記)』의 기초 자료가 된 『연행음청(燕行陰晴)』내용이 공개된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1780년 건륭제 칠순 잔치 축하 사절단 일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겪은 일을 기록한 여행기다. 이번에 파악된『연행음청』자료는 연암이 ‘연경(燕京‧베이징)’으로 가기 전 날씨와 행적 등을 간략하게 적은 일종의 ‘일기’다.

알려지지 않았던 43일간의 기록

연암은 청나라에서 돌아온 뒤 자료를 정리해『열하일기』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최초의 ‘기초 자료’는 알려지지 않았다. 『연행음청』엔 『열하일기』에 빠진 43일간 기록과 곤궁한 자신의 삶을 표현한 「빈경(貧經)」 등 작품도 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그래픽=차준홍 기자

떠나기 전 전별시 지어주고, 부채 선물 

『연행음청』에는 연암이 1780년 5월 10일 ‘연암(현 황해북도 장풍군)에서 중경(개성)으로 왔다’는 내용이 간략하게 나온다. 또 같은 달 17일 ‘한양으로 와 평동(서울 종로구 평동)에 있는 처남 이재성 집에 머물렀다’고 적었다. 그 뒤론 연암이 청나라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송별하러 찾아온 사람들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은 연암에게 ‘전별시(餞別詩)를 전해줬다’고 한다.

같은 달 22일엔 한 송별객이 부채 5자루를 연암에게 선물로 줬고, 25일엔 사절단이 연경으로 가기 전 ‘정조에 인사를 올렸다’고 했다. 이런 내용은 기존에 알려진『열하일기』에선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연암은 『연행음청』 원고지 여백에 다른 문인이나 출처를 알 수 없는 글들을 써놨다. 이렇게 기록된 글 중 절반가량이 훗날 쓴 『열하일기』에 수정돼 실렸다. 여백지의 글은 『연행음청』이 『열하일기』로 발전돼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다. [사진 단국대]

연암은 『연행음청』 원고지 여백에 다른 문인이나 출처를 알 수 없는 글들을 써놨다. 이렇게 기록된 글 중 절반가량이 훗날 쓴 『열하일기』에 수정돼 실렸다. 여백지의 글은 『연행음청』이 『열하일기』로 발전돼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다. [사진 단국대]

『열하일기』 뼈대가 된 『연행음청』

『연행음청』과『열하일기』내용을 비교해보면 이렇다. 예를 들어 『연행음청』6월 25일 기록을 보면, ‘방물(方物·청에 바치던 특산물)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내용, ‘구련성(九連城·중국 랴오닝 성 단둥)에서 노숙했다’라고 나온다. 하지만 『열하일기』엔 ‘여행 가는 사람들이 밤에 내린 비로 옷이 젖어 이를 말렸다’ ‘말을 관리하는 사람이 술을 사와 함께 마셨다’ ‘즐거워서 낚시했다’ 처럼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연행음청』에서 연암은 7월 28일 ‘옥전현(玉田縣)에 머무른다’고 했는데, 같은 날 『열하일기』에선 옥전현에 있는 숙소 벽에 걸려 있는 글을 봤다고 했다. 이것이 연암이 쓴 소설 「호질」의 소재가 된다.

날씨 기록도 비슷하다. 『열하일기』 시작일인 6월 24일 ‘朝小雨, 終日乍灑乍止(아침에 적은 비, 종일 비가 내리다가 그쳤다)’로 썼지만, 연행음청』에선 같은 날 ‘雨(비)’로만 표시했다.

『연행음청』 여백 곳곳엔 작은 글씨로 빼곡히 글이 곳곳에 나온다. 일부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학자인 황경원의 시문집 『강한집』에서 추린 내용이다. 나머진 연암의 창작인지, 남의 글 중에 뽑아 쓴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렇게 기록된 글 중 절반가량이 『열하일기』 속 「동란섭필」 「태학유관록」 「곡정필담」에 수정돼 실렸다.

“내게도 포숙 있었다면” 미공개 작품

『연행음청』엔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연암 작품도 담겼다. 제2장~제5장 「빈경」과 제7장 「열하궁전기(熱河宮殿記)」다. 두 작품이 『열하일기』나 다른 연암 문집에서 왜 빠지게 됐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학계에선 종이가 귀한 시절이라 덧붙여 썼단 주장이 있다.

「빈경」에는 깊은 우정을 뜻하는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 관중과 포숙 관련 얘기가 나온다.

 「빈경」 편집자와 교정자(붉은 원 안)가 ‘冷朝陽(냉조양)’, ‘李陽氷(이양빙)’으로 돼 있다. ‘찰 냉’과 ‘얼음 빙’ 모두 연암의 처지인 가난을 상징한다. 연암 특유의 해학을 보여준단 평가다. [사진 단국대]

「빈경」 편집자와 교정자(붉은 원 안)가 ‘冷朝陽(냉조양)’, ‘李陽氷(이양빙)’으로 돼 있다. ‘찰 냉’과 ‘얼음 빙’ 모두 연암의 처지인 가난을 상징한다. 연암 특유의 해학을 보여준단 평가다. [사진 단국대]

그런데 「빈경」 편집자와 교정자가 각각 당나라 문인인 ‘冷朝陽(냉조양)’과 ‘李陽氷(이양빙)’으로 돼 있는 게 흥미롭다. ‘찰 냉’과 ‘얼음 빙’ 모두 가난을 상징한다. 이름 뜻을 풀면 ‘썰렁한 아침 햇살’이 편집을, ‘수면 위의 얼음’이 교정을 맡았다는 의미로, 연암 특유의 해학적 표현이다.

이밖에 「열하궁전기」에선 진시황 ‘아방궁’과 한고조 ‘미앙궁’을 거론하면서 건륭제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궁전을 꼬집는다. ‘검소함에서 더 빛이 난다(儉之光輝)’는 문장으로 표현했다.

박철상 한국문헌문화연구소장은 “『연행음청』은 연암이 『열하일기』를 청나라 여행 중이 아니라 다녀와서 썼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말 그대로 『열하일기』의 뼈대”라며 “일기는 『연행음청』이고, 『열하일기』는 일기 형식 문학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연행음청』은 필체로 볼 때 연암이 쓴 게 틀림없다고 한다. 40년 넘게 연암을 연구한 김명호 전 서울대 교수와 고문헌 전문가인 박 소장 등의 주장이다. 박물관 관계자는 “오직 저자만이 할 수 있는 수정 흔적도 곳곳에 있다”고 설명했다.

석주선기념박물관, 8일 학술대회 개최

한편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은 8일 죽전캠퍼스 국제관에서 학술대회를 열고 『연행음청』 등 『열하일기』 초고본 계열의 이본(異本‧판본)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 이날 학술대회에선 박철상 소장이 ‘연암 『연행음청기』 의미와 가치’ 등을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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