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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준봉의 시시각각

홍범도는 죄가 있다?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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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신준봉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신준봉 문화디렉터

신준봉 문화디렉터

때아닌 홍역을 치르는 중인 홍범도 장군은 1868년 평양에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3년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정착촌 크질오르다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누구보다 오래 일본군과 싸웠고, 올해가 순국 80주년이다. 깔끔하게 10년 단위가 꺾어지는 해를 출판사가 상업적으로 노렸겠지만 홍범도는 요즘 벌어지는 논란 여러 달 전에 이미 우리 곁에 왔다. 평전과 소설 형태로다.

평생 독립운동 때아닌 좌경 시비
자유시 참변 가담 두고 의견 갈려
‘육사 흉상’ 오락가락 후손이 문제

시인 겸 문학평론가 이동순씨가 쓴 평전 『민족의 장군 홍범도』(3월 출간)는 특유의 감성적인 필체로 독자의 손을 잡아끈다. 중견 소설가 방현석씨의 두 권짜리 『범도』(5월 출간)는 요즘 출판시장에서 사문화된 ‘장르’인 대하소설에 가깝다. 1, 2권 합쳐서 1300쪽. 얇아지는 요즘 장편소설 네댓 권 분량이니 말 그대로 대하소설 모양새다. 길이에 대한 압박 없이 소설보다 파란만장한 홍범도의 생애를 박진감 있게 풀어낸다.

그런데 『범도』는 홍범도의 칠십 평생에서 52세, 청산리 전투까지만 추적했다. 그러고는 시간을 훌쩍 건너뛰었다. ‘극장 수위’(홍범도의 마지막 직업은 크질오르다의 고려극장 수위였다)라는 제목의 세 쪽짜리 에필로그에서 최후의 순간을 전하는 것으로 소설을 끝맺음했다. 그렇게 한 이유를 묻자 방현석의 답은 이랬다.

“청산리 전투가 홍범도 장군의 정점이지. 그 이후의 삶은 부록 같은 거고.”

아시다시피 요즘 한국의 공론장(신문·TV·SNS)은 바로 이 ‘부록’의 삶 때문에 뜨겁다. 많은 국민이 갑자기 홍범도 후반 인생의 키워드인 자유시 참변, 빨치산, 이르쿠츠크 공산당 이런 어휘와 친숙해졌다. 진지한 시민들은 해당 어휘의 역사적 배경까지 찾아본다. 신념에선지 아니면 어떤 정치적 계산에선지 이 정부가 던진 홍범도 돌팔매는 역설적으로 교육적이다. 뭔가 공부가 설익은 느낌의 유튜버들까지 물 만난 듯 열심인 게 흠이라면 흠이다.

기자도 덕분에 역사 자료를 뒤적였다. 그렇다고 특별히 내놓을 공부 결과는 없다. 많은 매체가 팩트체크 형태로 홍범도의 공과를 이미 훑었다. 그래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사실관계나 해석이 엇갈리는 대목은 물론 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을 둘러싼 논란이 핵심이다. 홍범도가 어디까지 개입했는지, 그 개입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는지가 관건이다. 내전에 휩싸였으면서도 소련 공산당 혁명 수출조직 코민테른은 압도적인 일본군을 피해 연해주 북쪽에 붙은 아무르주로 쫓겨온 독립군 조직을 통합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주도권 다툼을 벌이던 이르쿠츠크 공산당(조선사람들이다)이 원동공화국(코민테른의 소련과는 다른 나라다) 군대와 함께 상해 공산당원(역시 조선사람들)을 30여 명에서 400~500명가량 살해한 사건이 자유시 사건이다.

『홍범도 장군』을 펴낸 한국외대 반병률 사학과 명예교수는 상해 공산당 공격에 이르쿠츠크 측은 가담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이와 견해가 다른 학자는 많다. 동족끼리 죽여 참변이라는 것이다. 학자들은 대부분 홍범도는 공격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사건 직후 재판에는 관여했다. 말썽부린 상해 공산당원을 심판하는 재판위원이었다.

여기서부터 해석이 엇갈린다.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는 온정적이다. 홍범도 개인에게 불행한 일이었으나 재판의 공정을 기하기 위해 참여했다는 것이다(‘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반면에 경희대 허동현 교수는 “어쨌든 우파 계열(상해파) 독립군을 배반한 건 사실 아니냐”는 입장이다. 친일파를 단죄하는 틀을 적용하면 ‘죄질’이 안 좋다는 얘기다. 선의로 독립군을 챙기겠다며 친일 법정에 선 이를 어떻게 죄 없다 하겠느냐는 거다.

장군이 뼛속까지 공산주의자였는지 우리가 알 길은 없다. 그의 굴곡진 인생이 고스란히 우리 근현대사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의 흉상을 멋대로 육사에 세웠다가 떼겠다는 후손들이 문제다.